*이 글에는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바랍니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는 분명 새로운 형식의 영화는 아니다. 담지하고 있는 질문은 꽤나 묵직하지만, 액션물의 장르적 답습도 다소 느껴진다. 또한 장준환이 누구인가. <지구를 지켜라>라는 희대의 ‘컬트’ 영화를 만들었던 천재 감독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다소간의 클리셰와 감독에 대한 기대는 자칫 영화가 저평가 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화이>에서 모종의 미시감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영화가 뿜어내고 있는 완연한 서늘함 때문이다.

ⓒ 뉴시스

3살 무렵 유괴당한 화이에게는 5명의 아버지가 있다. 냉혹한 카리스마의 리더 ‘석태’, 운전 전문 말더듬이 ‘기태’, 이성적 설계자 ‘진성’, 총기전문 저격수 ‘범수’, 냉혈한 행동파 ‘동범’. 이 더럽고 끔찍한 폭력의 세계에서 최고의 인격자, 즉 군자(君子)란 세속에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속의 군자란 덕(悳)에 가까워야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군자란 곧 악(惡)에 가까워야 한다.

화이는 이 오(五)군자의 악을 자양분 삼아 그 악의 총체로 ‘인공수정’ 되어졌다. 그리고 유전자 조작을 하듯이 온갖 종류의 살인 기술까지도 심어졌다. 하지만 17년간 배워왔던 그 기술을 써먹게 되는 바로 그 순간, 화이는 격한 망설임에 휩싸인다. 이 망설임은 물론 모든 첫 경험들이 선사하는 선물과 같은 떨림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 떨림은 자신을 이 폭력의 세계에서 구출해달라는 하나의 비명과도 같을 것이다. 화이는 원래 ‘자연수정’ 되었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군자들과 화이 간의 결정적 차이가 발생한다. 오군자들은 마치 ‘자연수정’된 악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악이란 필연이 아닌 당위다. 그러나 화이는 군자들과 조금 다른 길을 택하며 ‘화이부동(남과 사이좋게 지내되 의(義)를 굽혀 좇지는 아니한다)’하려 한다. 이는 화이의 의상을 통해서도 명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화이는 그 끔찍한 일들을 치르면서도 절대로 교복을 벗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수정 되었던 선한 자아가, 왜곡되고 변질된 상태에서도 교복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진짜 모습(평범한 학생)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욕구, 다시 말해 일종의 무의식적 호출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자아의 화이가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은 결국 ‘도덕적 당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석태의 말마따나, 괴물을 잡기 위해선 먼저 괴물이 되어야 한다. 화이부동 하겠다는 소년의 다짐은 결국 여러 명의 피를 손에 묻힘으로서 스스로를 ‘도덕적 괴물’로 상정시킨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처단만으론 전혀 위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파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부정(父情)의 부정(否定)뒤에 마침내 발견된 어떤 발전적 존재가 아닌, 당위라는 살인면허를 부여받고 끝까지 나아가는 어떤 괴물의 ‘도덕적 파국’이기 때문이다.

화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진 알 수 없다. 다만 기타 가방을 멘 채 군중 사이로 명멸하는 화이의 뒷모습은 분명, 운명의 장난에 휩쓸렸던 <엘 마리아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완연한 서늘함은 그때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