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여름, 어머니는 꿈에나 그리던 집 장만에 성공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악착 같이 돈을 모으던 당신의 모습에 가족 모두 진저리를 쳤었지만, 기뻐하던 그 얼굴을 보며 우리는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집 장만이 중년 여성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 전학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눈물을 짜내며 반항심만 한껏 뽐냈다.
마냥 싫었던 차갑고 텅 빈 공간이 당신의 애정과 관심으로 채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신은 매일을 한결같이 쓸고 닦았다. 그곳은 그렇게 점점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안락했던 어머니의 공간에서 살았던 생활은 4년하고도 반년 만에 끝이 났다. 대학생이 된 나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하숙집, 고시원, 기숙사 등을 전전하던 나는 어느새, 집 소유를 꿈꾸며 부동산 가격에 울고 웃는 어른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20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경제력이 없던 나는 그러한 열망을 내 집 마련과 같은 비현실적인 목표보다는 어머니의 공간에서처럼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갔다. 
서울에서 ‘나 혼자만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혼자 지내던 방에서 조차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래서 혼자만의 공간을 찾지 못한다면 안락함이라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며 거리로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거리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20대들로 이미 포화 상태였다.
끊임없이 나만의 공간을 찾아 방황하는 20대
대학생이 된 후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연스레 터득한 두 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진정한 나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나에게 어서 빨리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으로 찾아 떠나라고 부추겼다.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공간을 묻는다면 단골 카페라든지 뒷산 언덕 등을 언급할 것이다. 20대 초반 나에게 나만의 공간은 낯선 사람 틈 속에 파뭍힐 수 있는 백화점이라든지 대형 의류매장, 대형 마트, 대형 서점이었다. 당시 나는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좋아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많은 낯선 사람이 등을 보이며 조그만 나를 둘러싸고 있어 어느 누구도 내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군대를 갔다 오고 나니 혹은 이사를 가게 돼서 자신만의 공간이 사라졌다고 한다. 나의 경우,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급격한 피로감을 느낄 때쯤에야 나만의 공간은 더 이상 나만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난 불안함을 느끼며 또 다시 나만의 공간을 찾아 나섰다. 이렇게 나의 20대는 불안정함 속 ‘특명, 나만의 공간을 찾아라!’의 연속이었다.

ⓒ조선일보

우리는 언제쯤이면 안정적인 나만의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유학생으로 생활하는 동안 계속해서 거주지를 옮겨 다녔기에, 거주에 대한 극도의 불안함에 스스로를 ‘나만의 공간’을 찾도록 몰아붙였을 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이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타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나만의 공간은 어느 누구보다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종 손님이 없는 카페에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이도 없는데 왠지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 같아 어서 빨리 자리를 뜰 때가 있다. 그렇게 밖을 나와도 넓디넓은 서울 하늘 아래 어디도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는 것 같아 길 위를 정처 없이 헤매다, 그냥 집으로 들어와 무기력함에 멍하니 앉아있다. 이렇게 몇 주 내내 나만의 공간을 찾지 못할 때 항상 생각나는 곳은 결국 어머니의 공간이다. 
결국 내 불안의 원인은 주거지 문제에서 발생했기에 다시금 부모님이라는 안정적인 처마 아래를 떠올리게 된 것일까.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어 고리타분해 보이는 어른의 일상을 싫어하던 나였지만 이제는 불안정한 주거 문제만 해결될 수 있다면 어른의 세계에 하루빨리 입성하고 싶다. ‘어른이 되어도 거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의문이 슬쩍 떠오르지만 애써 무시한다.
11월 중순이 되면 내 인생의 첫 자취방을 얻기 위해 복덕방을 동분서주 하며 돌아다녀야 한다. 어쩌면 그 곳이 진정 나에게 안락함을 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한편, 부모님이 빌려주실 한정된 돈으로 만족할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밀려든다. 올해 겨울에는 거주 문제에 대한 공포 없이 나만의 공간을 찾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살 곳을 걱정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우리를 영영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