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를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20대’라는 기간에는 개인의 한 평생의 씨앗이 담겨있다. 20대의 내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쌓이고 얽혀 미래의 나를 만든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씨앗’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기 위해, 그들의 20대를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그 첫 번째 인물, 17대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낙선 후 더 유명해진 BBK저격수, ‘정봉주’다.


‘탄돌이’, ‘나꼼수’, ‘깔때기’, ‘BBK‘, ’저격수‘ 정봉주가 돌아왔다. 정치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의 주변은 늘 시끄럽다. 뭔가 ‘특별한’ 사람만이 정치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통념 속에서도 정봉주는 한층 더 ‘특이한’ 정치가다.

오랜 수감생활을 마치고, 지난 SBS ‘최후의 권력-7인의 빅맨'(이하 ‘최후의 권력’) 제작발표회에 등장한 정봉주는 “종편에서 정치인들이 까불고 무너지고 하는데 내가 원조다. 나는 노출이 많이 됐으면 좋겠다”며, “정치인들이 화장한 것을 까고 민낯으로 시민들과 마주해야한다고 본다. 정치인이 자기를 무너뜨리고 깨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하며 복귀를 선언했다.













































 연도 나이  활동 
 1970s 후반    대학 삼수
 1980  21세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입학 
 1981  22세  ROTC 입단, 민주화운동에 매진
 1982  23세  민주화운동에 매진
 1983  24세  9월, 학내 시위에 연루돼 구속
 1984  25세  진보 월간지 <말> 기자 활동
 1985  26세  아내 송지영씨 만남
 1980s 후반    미국 유학
 1991 32세   서울시의원 공천


 (표 : 20대 정봉주의 약력 Ⓒ 고함20)



민주화 운동과 문익환 목사


정치를 사회운동으로 인식하는 내 마음속 영원한 등대이며 스승님은 문익환 목사님이다. …(중략)… 문목사님 댁에 가면 ‘신랑이 신부방을 드나들 듯이 감옥에 가라!’는 말씀이 벽에 걸려 있다. 그만큼 치열하게 대한민국 현대사를 저항의 정신으로, 민주화의 상징으로, 온몸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그 문목사님이 항상 정봉주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저서, <울지마, 정봉주> 中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3년, 24세의 청년 정봉주는 구속됐다. 대학 입학 후 계속해오던 민주화운동이 원인이었다. 시위를 일삼는 아들을 걱정한 아버지의 조언으로 ROTC에 입단했지만 결과적으로 효과는 없었다. 4학년 때 학내 시위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하다가, 그 해 9월 28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돼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살게 된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10여 일을 있다가 구치소 독방으로 옮겨졌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처음 들어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1평 조금 넘는 독방에서 지낸 첫날, 자다가 새벽 1시쯤 깼다. 민주화투사의 면모는 간 데 없고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병아리 신세 같았다. 잠에서 깨어서는 울부짖으며 잘못했다고, 내보내달라고 빌었다. 교도관이 무슨 수가 있겠는가? 아무 책이라도 없냐고 해서 받은 것이 성경이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으면서 간신히 조금은 안정이 됐고,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적응하는 데 두 달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정봉주는 198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20대의 대부분을 운동권 생활을 하면서 문익환 목사를 모셨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 약 3년의 시간동안 아침 7시에 영어 회화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문익환 목사를 차로 수행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아웃사이더 인생



타고난 기질이 도전적이고, 규격화된 제도의 틀을 싫어해서인지 삶 자체가 아웃사이더, 비주류였다. …(중략)… 정치를 하면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일단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계보를 형성하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면서 제 식구 감싸기 하는 것이 우스웠다. 현실논리를 펴면서 안주하는 모습도 싫었다. 그런 선택이 나를 아웃사이더의 길로 내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저서, <울지마, 정봉주> 中


청년 정봉주의 인생은 엘리트의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묵직한 훈계보다는 땡땡이치는 것으로부터 더 많은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고 말하고 다닐 만큼 어릴 때부터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와는 멀었으며, 대학 입시도 2년간의 재수생활을 통해 간신히 통과했다.

대학에서 학생 운동할 때는 그나마 인정을 받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정통 운동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한테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중요한 결정이나 논의가 있을 때는 자기들끼리 따로 논의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본질적으로 ‘진중한’ 운동권의 분위기에 융합되지 못하고 겉돈 것이다.

이런 패턴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2000년대에도 이어져, 민주화운동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보’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직책을 받지 못했다. 열심히는 했지만 평가를 좋게 받은 적은 없었다. 당내 선거 등의 주요 행사가 있을 경우 조직을 구성하면 의미 있는 직책은 다 ‘정통성’이라든지 ‘진중함’을 인정받고 화려한 민주화운동 경력을 가진 다른 사람의 몫이 되곤 했다. “좋은 평가는 더 진지하게 말하고 과거 운동권 시절에도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었던 후배들 몫으로 돌아갔다”고 그는 말한다.

저서 <달려라, 정봉주>에서는 부인들끼리의 모임에서 누군가의 부인이 했다는 얘기를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정봉주 걔는 지가 무슨 연예인인줄 아나봐?”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질책했다. “당신도 이제 다른 사람 뭐 하는데 도와주지 좀 마. 무슨 똘마니처럼 다른 사람 도와주고 인정도 받지 못하고 그래!”

그러나 그는 아웃사이더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고, “기존 체제에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면서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기존 정치권에서는 소외될지라도, 국민과 소통하면서 국민만을 보고 간다는 길을 걷겠다”고도 다짐한다. 국민을 위한 아웃사이더, 그것이 바로 2009년 ‘나꼼수’의 열풍을 가져오고 정봉주를 정치 무대로 우뚝 세운 원칙이 아니었을까.

폴리테이너의 길로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꿈을 꾸면서 성장기를 보낸다. 나는 거의 일관되게 정치인의 꿈을 갖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에야 아무것도 모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학 입학 대 최종 면접을 보는 교수님이 꿈을 묻기에 대통령이라고 했다. …(중략)…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늘 철이 들지 않아서인지 고정적인 꿈을 꿈대로 놔두고 수시로 떠올랐던 꿈이 연예인이 됐으면, 혹은 교주가 됐으면 하는 것이었다.

저서, <울지마, 정봉주> 中

‘정치인’, ‘연예인’, ‘교주’, 청년 정봉주가 가졌던 3가지 꿈의 본질은 대중의 관심과 지지다. 정봉주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솔직함’을 택했다. 솔직함이 대중과의 소통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정봉주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국민 모두가 주인공인 정치”는 바로 이런 욕망에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정치 무대로부터 억압받고 소외당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나팔수가 될 수 있었다.

짧은 정치 경력을 가진 정봉주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사실 2009년 MB정권과 대립하면서부터다. 그렇다. ‘나꼼수’ 열풍이다. ‘폴리테이너’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는 “정치를 시작할 때에는 성공하고 싶은 개인적 야망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만큼 “정치를 하면 할수록 정의로운 사회와 개혁에 대한 열정은 개인의 욕망 앞에 점점 지워져가는 것 같다”고 한다.

“이 땅의 모든 국민 한 분 한 분이 주인공인 정치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주인공인 여러분은 한없이 높아지고 저는 한 없이 낮아지겠습니다.” 정봉주는 국민의 힘을 믿는다. 이제 국민들은 강력한 sns로 무장한 채로, 정치를 주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더불어 국민들은 “정치를 근엄한 주제로 접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폴리테이너’로서 국민과 함께 즐기면서 신나게 정치에 접근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