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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20대] 심상정을 만든 건 팔할이 ‘경험’이었다

20대를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20대’라는 기간에는 개인의 한 평생의 씨앗이 담겨있다. 20대의 내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쌓이고 얽혀 미래의 나를 만든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씨앗’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기 위해, 그들의 20대를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그 세 번째 인물은,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다.

ⓒ 민중의소리

심상정 의원은 모든 이들의 저격수를 자처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주체를 가리지 않는다. “셧다운 땐 다 공멸”, “국정파행 막을 정치력 있어야 집권여당”, “정작 직을 걸어야 할 사람은 황우여”, “준예산 편성되면 여야 모두 공멸할 것” 등의 공격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노동 운동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마다치 않고 달려간다. 모두가 외면한 통진당 단식 농성장에서도 심상정은 모습을 드러낸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심상정 의원, 끈질긴 정치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

얼치기 운동권 학생 심상정, 노동운동의 길을 걷다

심상정 의원은 대표적인 ‘긴급조치 세대’다. 심상정 의원이 대학에 입학했을 땐, 유신 말이었고 2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으며, 3학년 때는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심상정 의원은 그야말로 ‘뚜렷한 거짓’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셈이다. 심상정 의원은 자서전 ‘당당한 아름다움’을 통해 이렇게 회고한다.

“입학 첫해인 1978년 봄 어느 날, 우연히 지나던 학교 도서관 건물 5층에서 한 선배의 ‘군사 독재 타도’ 외침과 함께 유인물이 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달려든 사복 경찰들은 그 선배를 피투성이로 만든 뒤 질질 끌고 갔다. 당시만 해도 학내 시위를 감시, 진압하기 위해 사복 경찰이 교정에 상주하며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대학의 현실을 처음 목격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서, <당당한 아름다움> 中  


심상정이 처음부터 어떤 큰 이념이나 선배의 안내를 통해 운동권 학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를 따라서 운동권에 발을 들여 놓았고, 마음에 드는 남학생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히 시위 대열을 따라다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미대에 다니는 언니의 영향을 받아 잔뜩 멋을 부리고 다녔다. 치렁치렁한 생머리에 7센티미터 이상의 하이힐을 신고 스커트 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런 차림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신림사거리까지 시위 대열을 따라 내달렸건 것이다. 뜨악한 눈으로 이 ‘얼치기 운동권 학생’을 바라보던 학생처장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저서, <당당한 아름다움> 中 


심상정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운동권으로 빨려 들어갔다. 옷차림새도 어느 틈엔가 ‘운동권 표준 패션’으로 바뀌었다고 심상정은 회고한다. 긴 머리를 하고 시위 대열을 따라다니다 보니 너무 더웠고 스커트 차림은 아스팔트 바닥에 퍼질러 앉기에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심상정의 대학 생활의 세 가지 꿈은 연애, 독서, 여행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꿈을 좇다 보니 어느새 맹렬한 운동권 학생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 시기에 심상정은 자신의 인생에 등불이 되어 줄 인물, ‘전태일’을 만나게 된다. 79년 당시, 뒤늦게 운동권 대열에 합류한 심상정은 도서관에 하루 종일 앉아 <민중교육론>, <제 3세계혁명론>, <소비에트운동사>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열독’의 과정에서 <전태일 평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독서를 통해 형성된 문제의식을 여러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 심상정은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하게 된다. 당시 대학문화연구회는 문학에서부터 역사, 사회 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토론했지만 주류 학생 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토론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학회에 실망하면서 심상정은 학생 운동의 본류인 ‘실천’을 지향하고자 노력했다.

또 심상정은 여학생을 학회의 꽃으로나 생각하고 실천 단계에 접어들면 배제하는 학회의 현실에 분노했다. 여성들이 보조역이 아닌 주체로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최초로 ‘총여학생회’, ‘여학생만의 학회’를 만들게 된다. 또 운동권 학회들에게 ‘여학생을 학생 활동가, 사회 운동가로 키우지 못할 바엔 아예 여학생을 모집하지 말라’고 포고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독재타도’도 중요하지만 사회 운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심상정은 점차 평범한 대학생에서 ‘노동 운동가’로 변신을 거듭하게 된다. 심상정의 변신에는 자신이 만든 최초의 여성학회의 영향도 컸다. 이 학회 회원들이 이후 노동 현장으로 이전해 ‘구로동맹파업’을 조직하는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상정 또한 제일 먼저 구로 공단에 위장 취업하게 된다. 심상정의 나이 스물두 살 때의 일이다.

“파업 닷새쯤 되던 날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보던 중 화면에서 “1계급 특진, 현상금 5백만원”이 걸린 내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언론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었다.…당시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까지 걸려 있었다. 붙잡히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극악한 인권 탄압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저서, <당당한 아름다움> 中  


심상정은 이곳에서 만난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노동자의 삶을 체험하고 실태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당시의 경험이 심상정에게 ‘노동 운동’의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후 최초의 정치적 동맹 파업이었던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주동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1990년까지 ‘수배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 기간 동안은 지인과 약속을 잡을 때에도 미리 약속 장소 근처에서 미행이 붙지 않았는지 살펴볼 수밖에 없는 철저히 ‘숨겨진’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지인들에 대한 모진 고문도 심상정에겐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그렇게 심상정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심상정을 만든 건 ‘투철한 이념 정신’ 뿐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여대생에서 운동권과 노동운동가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매 순간의 성취는 ‘경험’에서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운동권에서의 이론보다는 ‘실천’을 지향하는 방향성이 그러했고, ‘미싱 바늘이 엄지손톱을 밟고 지나가곤 했던’ 노동 운동에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활동이 그러했다. 그렇게 심상정은 어디서도 얻지 못할 미래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을 차곡차곡 쌓아왔던 셈이다.
 

“2008년 4월 10일. 버릇대로 새벽에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려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새벽임을 깨닫는다. 그래, 선거는 끝났고 우린 패배의 쓴잔을 들었지. …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의석 하나 못 건진 당은 어떻게 하나’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나보다 더 절망할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보 정치는 ‘관념’에서 ‘생활’ 속으로 내려와야 한다. 진보 정치에 대한 신뢰는 몇 가지 정책 제시만으로 획득될 수 없다.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생활 정치의 모범을 만드는 일, 그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생략한 것,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패배가 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저서, <당당한 아름다움> 中  


‘관념보다 중요한 실천의지’. 심상정의 인생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이렇다. 낙선 후 인터넷 게시판을 떠돌던 ‘지못미 심상정’이라는 씁쓸한 유행어도 심상정 의원이 가진 정치적 생명과 에너지의 원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낙선한 심상정을 위로했고, ‘이사 가서 지켜주겠다’고 까지 말하며 그를 지지했다. 심상정의 실천적 연대는 그렇게 대중의 마음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념’으로 무장했을 것만 같던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심상정 의원, 그녀의 단단함이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고함20
고함20

20대의 소란한 공존 [고함20]의 대표 계정입니다.

1 Comment
  1. Avatar
    aKiefer

    2013년 12월 16일 12:33

    기대되는 연재네요. 잘 읽었습니다. 제목을 좀 더 신선하게 바꾸면 어떨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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