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지난해 말 대학가에서 시작했던 떠오른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은 ‘안녕’하지 못한 20대들이 서로를 위로했다. 왜 20대는 안녕하지 못할까. 처음 대자보를 작성한 주현우씨는 대자보에서 “침묵하길, 무관심하길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 아니었나요?”라며 동세대가 갖는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지금의 20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20대가 각자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죽하면 20대는 스스로를 호명하지 못한 채, 누군가가 대신 호명하는 이름으로 불리고 힐링 또는 멘토를 찾아 방황하겠는가.

 

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표지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쓰고 킴이 그림을 그린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주체성을 잃은 채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받는 20대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물음을 던지도록 한다. 이 책은 한 인간의 실패담을 다룬다. 실패담은 단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주인공이자 화자 안토니오의 한평생 90년에 걸친 끊임없이 이어진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안토니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실패와 패배를 줄지어 방문하는 것이 그의 일생의 여정이다.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가 없다. 자신의 가치와 신념이 붕괴되고, 타인의 위선에 치가 떨리는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자유를 갈구했다. 자유란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안토니오는 땅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던 아버지와 형제가 있는 자신의 출생지이기도 한 페나폴로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했고,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는 아나키스트의 사상을 받아 의용군에 가담하여 프랑코군에 저항했다. 난민이 되어 프랑스로 유입되고서는 레지스탕스가 되어 파시스트로부터 프랑스의 자유독립을 위해 참전했다. 이렇게 20년에 가까운 삶을 신념에 의해, 그리고 자유를 위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안토니오의 삶은 패배의 연속이었다. 의용군은 소련에 의해 군대화되었다. 공동체의 재산은 사라졌고, 계급과 자본은 자유를 향한 그들의 신념을 갉아먹었다. 레지스탕스는 자유가 아닌 정치적 이익을 좇는 데에 열중했고, 의용군 시절 함께 신념을 공유했던 ‘납탄동맹’의 일원은 죽거나 자본가로 변질됐다. 연이은 패배는 안토니오를 지치게 했다. 결국 안토니오는 “최선의 선택은 그 시절을 지우는 것이다. 숭고한 사상과 함께 내가 날아오를 수 있었던 그 시절을…”이라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본국인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은 그가 맞서 싸우던 프랑코 체제가 변함없이 건재했다. 이런 상황은 안토니오를 더욱더 무력하게 했다. 기댈 곳을 찾아 페트라를 맞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가정의 존재는 안토니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했다. 사촌의 도움으로 시작한 사업까지 실패하자 안토니오는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아내 페트라의 종교적인 광신은 이제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안토니오는 다시 자유를 향한 결심을 하게 된다. 페트라를 아들에게 맡기고 홀로 양로원에 들어간 것이다.
육신은 늙어버렸고, 과거처럼 ‘숭고한 사상’과 체제에 저항하려는 ‘투쟁심’은 없이 환멸에 가득찼지만, 그것은 안토니오에게 최소한의 자유를 위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양로원은 노인들에게 긍정주의와 낙관주의를 강요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이 정한 규칙대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노인들의 불평이나 불만은 수용이 아니라 묵살의 대상이었고, 노인들은 그 자체가 관리대상으로 통제됐다. 겨우 정을 나눈 친구들은 자리를 비웠고, 납탄동맹의 마지막 일원인 마리아노와 아내 페트라까지 차례로 죽었다. 이제 안토니오는 마지막으로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매듭지을 자유를 갈구한다. 90년이라는 일생에 걸친 자유로의 여정의 마침표. 안토니오는 마지막 비행을 통해 마무리지었다.

 

ⓒ 책 갈무리

안토니오는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위인’이나 시대를 바꾼 ‘영웅’이 아니다. 명망 높은 사회적 인물도 아니고, 한국의 ‘회장님’들처럼 많은 재산을 불린 자본가도 아니다. 그리고 흔하디 흔한 ‘멘토’로 여겨지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그는 그저 역사의 흐름을 겪은 한 명의 개인이다. 그럼에도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를 통한 안토니오의 고백은 읽는이로 하여금, 특히 우리 세대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가 겪어온 고난과 역경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개인들이 겪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 지난한 역사 속에서 자유를 향한 안토니오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개인은 모두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꿈은 대게 어떤 굴레를 벗어나는 자유를 지향한다. 거창하거나 소박하거나 하는 구분과 무관하게, 대의에 가득 차 있거나 얕은 이기주의에 갇힌 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자유를 향한 걸음을 필요로 한다. 개인의 꿈이 바로 성공을 향해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게 실패와 패배를 거치며, 심지어 실패와 패배만을 오가기도 한다. 인고의 시간은 종종 개인의 꿈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현실에 순응하여 안주하도록 유도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현실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주문과 포장이 개인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현실은 지치고 피곤하고,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을 만큼 각박하다. 현실의 삶은 자유를 꿈꿀 여유를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지금 당장만을 주목하도록 한다. 안토니오가 시골에서 자유를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에게나 존재하는 특권이라는 생각하는 것도 그런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삭막하고 야속하다는 것이 낙담과 패배의식을 내재화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든 이겨내고 할 수 있다는 무책임하게 모일정도의 낙관주의 역시 경계의 대상이다. 패배주의와 낙관주의 모두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또 비참하게 만든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하던지 무의미하고, 나만 잘하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면 지금의 고민과 생각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유를 향한 지향은 주체성의 발로다. 계속되는 삶의 굴레, 역사의 파도에 개인은 넘실거릴지언정 휩쓸릴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단단히 고정할 필요가 있다. 어느 아나키스트는 그것이 자유를 향한 궁극의 의지라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주체성 확립을 위한 길이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잃고 현실에 굴복할 때, 개인은 주체성을 잃고 자신을 타자에게 또는 사회에 놓아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는 납탄동맹의 외침은 자유를 통한 개인의 주체성 확립을 향한 그들의 바람을 함축하고 있다. ‘지금, 바로 여기’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를 향한 걸음을 쉴 수 없다.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