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점부터 언론이 대학을 평가하고 있다. 언론사 대학평가가 수험생, 학부모에게 영향을 주면서 대학도 언론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중앙일보가 대학평가로 꽤나 재미를 보자 다른 신문사도 줄지어 대학평가에 뛰어들었다. 고함20도 염치없이 이 축제에 밥숟가락 하나 올리고자 한다.

 

다만 논문인용지수, 평판, 재정상황으로 대학을 평가하는 방법을 거부한다. 조금 더 주관적이지만 더 학생친화적인 방법으로 대학을 평가하려 한다. 강의실에선 우리가 평가받는 입장이지만 이젠 우리가 A부터 F학점으로 대학을 평가할 계획이다. 비록 고함20에게 A학점을 받는다고 해도 학보사가 대서특필 한다든가 F학점을 받는다고 해도 ‘훌리건’이 평가항목에 이의를 제기하는 촌극은 없겠지만, 고함20의 대학평가가 많은 사람에게 하나의 일침이 되길 기대한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교육부가 제출한 ‘340개 대학(일반대 201개, 전문대 139개) 성적 증명서 이중 발급 현황’에 따르면, 관련 자료를 제출한 236개 대학 중 이중성적표를 발급하는 곳은 69개(30%)였다.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대학까지 고려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중성적표는 성적증명서가 열람용(교내용)과 제출용(교외용)으로 구분된 것을 말한다. 열람용 성적증명서에는 F학점 표기를 비롯해 취득학점 포기, 재수강 여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나, 제출용 성적증명서에는 이중 일부 혹은 전체가 삭제되어 있다. 말하자면 열람용은 민낯 상태, 제출용은 결점을 가린 풀 메이크업 상태인 셈이다.

 

 

 

겨울방학을 맞아 재충전의 시기를 즐기던 학생들에게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다가온 이중성적표 학칙 개정이 대학평가의 열여섯 번째 주제되겠다.

 

 

 

이중성적표는 말 그대로 성적표를 ‘이중’으로 발급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불필요한 제도 관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이 이중성적표를 발급하고 있는 이유는 극심한 취업난 때문이다. 구직 활동에 뛰어든 취업준비생들에게 학점은 곧 학부 시설의 성실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학점은 곧 기본 스펙이므로 졸업 시기를 미루면서까지 너도 나도 취업을 위한 학점 세탁에 열심이다. 이렇게 평균 학점이 상승하는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면서, 취업 시장에서 변별력이 사라지고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나기도 한다.

 

 

 

작년 12월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가 학점 인플레이션의 주적으로 이중성적표를 지목하면서 성적표기 방식이 수술대에 올랐다. 교육부는 대학이 소위 학점세탁이라는 관행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민낯을 드러낼 것을 요청했다. 대교협 역시 3월 말까지 대학 스스로 ‘학생성적 관리 개선방안’을 마련해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대학의 성적관리가 대학재정지원사업과 연계될 것이라는 방침에 따라 대학들은 이중성적표 관련 학칙을 개정하기 시작했다.
 

 

 

이중성적표

 

 

 

 

P / 이중성적표를 발급하지 않은 167개 대학,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104개 대학

 

소위 학점세탁이 암묵적 관행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167개의 대학이 이중성적표를 발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되레 놀랍다. 비정상의 향연 속에서 홀로 정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아이러니다.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 용기를 낸 대학에는 패스를 드리나, 결국 취업 시장에서 해당 대학의 학생들은 선의의 피해자가 되었다.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대학은 이번 학칙개정 논의에서 슬그머니 한발을 뺄 수 있게 됐다. 이중성적표를 발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 소재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기준을 충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안에서 빗겨나 슬그머니 넘어갔다는 의미에서 다소 찝찝한 패스를 주겠다.

 

 

 

F / 고려대, 서울여대, 전남대, 한국외대 외 이중성적표 학칙 개정 대학

 

이중성적표 제도에 메스를 댄 대학은 시도는 이상적이었으나 과정상의 문제로 인해 모두 페일(Fail)을 받았다. 많은 대학에서 학칙 개정 내용에 대해 유예기간을 두지 않고 당장 다가오는 새 학기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학생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하자 한국외대, 건국대 등은 제도 적용 학년을 유예하거나, 시행 시기를 유보하는 등 혼선을 빚었다. 

 

 

 

이처럼 전달 방식이 학교의 일방적인 통보인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정작 학칙을 지키게 될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는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학칙을 만드는 사람 따로, 지키는 사람 따로인 셈이다.

 

대학생 10명 중 9명 이상이 B학점 이상으로 졸업한다. 그들은 취업 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교열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행적으로 학점을 세탁해왔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책임 소재까지 떠안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중성적표는 뻔뻔한 대학생들의 화장발이 아닌, 극심한 취업난에 맞물린 대학가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중성적표 관련 학칙 개정에 있어서 학생들을 ‘불공정경쟁의 주체’가 아닌 ‘또 하나의 희생자’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이중성적표는 텁텁한 취업난으로 인해 자리 잡은 불가피한 관행이다. 잘못된 관행은 반드시 없애야 하지만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고, 개선 과정상의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인데 대학만 지성의 상아탑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이번 개정으로 인해 학생들은 잘못된 관행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무임승차자로 지목받았으나, 그 이면은 달랐다. 다가오는 봄 학기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은 녹겠지만, 학점 전쟁을 눈앞에 둔 캠퍼스는 여전히 겨울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