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도) 보(도 못한) (독립)잡(지)] 독립잡지. 모든 이들의 취향에 맞춰야 하는 대중 잡지의 주류(main stream)성은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다양하면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출판물이 탄생했다. 상상초월 기획과 실험적인 디자인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잠재력이 담겨있는 독립잡지들. 당신의 영감과 상상력의 목마름을 채우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면 읽어라. 색다른 시도로 세상을 파고드는 독립잡지들을 두 기자가 상반된 시선으로 접근한다. 연애할 자유가 있다면, 연애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듣보잡 연재의 첫 타자는 계간지 <홀로>이다. <홀로>의 편집장 짐송은 솔로 생활 25년 차 끝에 “솔로로서 정체성을 온전히 존중하며 말하기를 실현하는 매체”를 만들기로 했고, 그 결과 태어난 것이 계간 <홀로>이다. <홀로>의 풀네임은 “전방위, 무정형,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연애하지 않을 자유.” <홀로>는 2013년 2월 24일에 창간된 계간지로 현재까지 총 4개 호가 발행되었다. 1인 잡지 <홀로>는 “연애지상주의가 지배하고, 특정 생활 규범이 당위가 되어버린 시대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편견 사이를 미끄러지면서 웃고 떠들고 놀자!”라는 모토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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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홀로’의 1주년 기념호
릴리슈슈 기자 : 홀로(솔로)가 보는 <홀로>나는 <홀로>라는 비연애주의 삐라를 단순 ‘열폭’으로 치부하지 않길 권한다. 모태솔로가 술자리 단골 놀림거리가 되고, 솔로들이 ‘웃픈’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솔로가 ‘연애문화’를 비판이라도 하면 열등감 표출로 여긴다. 그러나 계간홀로는 그런 사회적 비웃음을 감수하고 꿋꿋이 연애지상주의와 싸우고 있다. 여기는 연애 이데올로기와 싸우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최초의 보루이다.

연애, 지극히 사회적인

계간 <홀로>는 이 세상이 연애에 권력을 부여하고 연애 여부로 우열을 나누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연애지상주의 사회’를 공격하는 접근방식은 다양하다. ‘연애(戀愛)’의 기원을 찾아 들어가 ‘연애(戀愛)’란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고 폭로하고, 근대가족제도를 지탱하는 통치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밥 먹고-영화 보고-커피 마시는 정형화된 연애를 이야기하며 연애 이데올로기를 소비주의, 자본주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연애하는 것’은 개인의 지극한 사생활일지 몰라도, ‘연애 개념과 그에 파생되는 문화’는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연애’는 다분히 사회적인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연애 이데올로기’ 논의를 위한 사회적 발판은 거의 없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좌파솔로청년들이 모여 ‘연애지상주의 반대집회’를 했을 때, 형사와 경찰은 “아니 크리스마스에 연애를 못 할 것 같으면 교회 나가지 추운데 나와서 왜 이러고 있습니까?”라며 공적 집회를 단순히 사적 투정 정도로만 치부해버렸다. 굳이 이런 사례를 들지 않아도, 연애에 대한 논의를 온전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만 돌아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회는 분명히 존재하는 반-연애주의의 목소리를 들을 가치도 없는 의견으로 생각하고 있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사랑할 자유

나는 <홀로>의 고독한 투쟁에 지지를 보낸다. 더불어, 그들의 ‘연애지상주의’ 타파를 위한 저항운동이 ‘낭만적 사랑’의 부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연애 이데올로기가 솔로를 ‘불완전한, 불행한’ 이미지를 덧입히는 것은 물론 낭만적인 사랑의 존재를, 그 가능성을 묵살하고 있다. 이 땅의 비연애인구들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주말에 외롭지도 않니, 연애나 해라.”라고 권유받고 있다. 이 권유는 다분히 문제가 있는데, 어떠한 관계의 필요성을 ‘외로움’이라고 전제하지 ‘사랑’이라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랑이란 감정은 준비할 틈도 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외로워서 황급히 시작한 연애가 과연 사랑으로 발전할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알랭드 보통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상대의 짙은 눈빛이나 세련된 정신세계 때문이 아니라 저녁 내내 혼자 일기수첩이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연애를 하려고 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랑 개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라고 적지 않았는가.

연애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낭만적 사랑을 뽑아버리고 그곳에 능력으로서 연애, 기술로서 연애를 심어 놓았다. 연애지상주의 사회에서 출현한 픽업 아티스트를 보라. 그들은 상대방 몸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방법만 고심하지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사랑할지에 대해 말하진 않는다. 연애 컨설턴트들은 연애라는 갑-을 관계에서 어떻게 갑의 자리를 선점할지를 알려준다. 그렇지만 애초에 사랑이란 사람을 엉망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누가 사랑 앞에서 갑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홀로!

<홀로>를 단순히 솔로들의 열폭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사회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로서 ‘연애’를 고찰해보기를 권유한다. 연애’라는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사회적이며, 폭력적이다. 꿈꾸던 낭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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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화이트데이인가, 그냥 2014년 3월 14일인가
오후 4시 기자 : 짝꿍(커플)이 보는 <홀로>계간 <홀로>를 처음 접했을 때 하기 쉬운 착각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들이 비판하는 대상이 ‘연애’라는 착각. 나머지 하나는 이들이 홀로가 커플보다 낫다고 주장하며 사랑을 거부한다는 착각이다.

먼저 이들이 겨누고 있는 타겟은 ‘연애’가 아니다. 공격 대상은 ‘연애 권하는 사회’ 그리고 ‘연애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들은 명절날 지긋지긋한 친지들의 잔소리와 같이 비(非) 연애 인구의 일상에 가해지는 각종 오지랖에 일침을 가한다. “연애는 언제 할 거니.”, “그러니까 애인이 없지.” 등 마치 연애가 정상이고 연애를 하지 않음이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홀로가 커플보다 낫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홀로와 커플이 동일 선상에서 주체적인 개인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특히 모태솔로의 경우 자발적으로 혼자가 되기를 선택했다는 시각을 지향하며 ‘무언가 모자라서 그랬겠지’라는 식의 접근을 지양한다. 사랑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다. 다만 왜 ‘연애’여야 하는가에 의문을 던질 뿐이다.

세상은 홀로 들과 커플들로만 나뉜다?!

창간 1주년, 비연애 인구만을 필진으로 받던 <홀로>가 연애인(?) 필진의 글도 함께 실은 것은 그래서 의미 있다. 엄밀히 따져 보면 이들이 반대 하는 대상은 대한민국에 자리하고 있는 잘못된 ‘연애문화’다. 이는 ‘홀로’들뿐만 아니라 커플들에게도 바로잡아야 할 과제다.

게다가 “커플들 너희가 뭘 알아?” 식의 태도는 또 다른 편 가르기를 양산한다. 우월성을 떠나서 모든 비연애인구가 연애 인구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연애 인구는 한때 비연애인구에 속했었고, 언제든 비연애인구가 될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설적인 조언마저 “듣기 싫으니 나가 있어!”로 뭉개 버리는 것도 아쉬움을 더한다.

<홀로>가 비판하는 주요 골자 중 하나는 사회에 팽배한 가볍고, 계산적이며 거래관계까지 얽혀있는 연애를 “왜 나에게 추천하는가!”라는 물음이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필진조차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단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는 자인하는 측면도 있다. 더구나 당신을 아끼는 이라면 그 누구도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연애’를 추천하지 않는다.

<홀로>를 읽고 있으면 ‘이런 연애는 나라도 거절입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앞으로 연애를 하고 싶어 하거나, 해왔던 사람들, 더 나아가서 결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연애의 본질은 결코 순간의 유흥이 아니다. 연애라는 이름의 근간은 신뢰와 균형을 전제로 한 진짜 사랑이다.

커플은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다. 수많은 관계의 이름 중 하나일 뿐이다. 때문에 커플이 되고 되지 않고는 친구를 사귀거나 사귀지 않는 식의 개인 선택을 기반으로 한다. 당연히 타인이 강요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한때 비연애인구였던 사람의 입장에서, 삶에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로 ‘연애’를 추천할 뿐이다.

“누군가 내 편이 되어주길 원한다면 그것이 꼭 연애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라는 말에서는 <홀로>가 지향하는 사랑이 드러난다. 굳이 연애가 아니어도 내 편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를 ONLY ONE으로 대해줄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연애’가 필요하다. (부모의 사랑이나 신의 사랑, 또는 다자 연애와 같은 문제는 논외로 하자.)

공지영 작가의 책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 ‘우리는 언제나 열렬히 사랑하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이성애든 동성애든 이를 넘어선 인류애든 서두르지 않길 바란다.

누구나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명제다. 우리 모두 모태에서 나올 무렵에는 홀로였다. 삶의 속도가 다르듯이 사랑의 속도도 다르다. ‘연애’라는 타이틀에 목매면서 아무나 만나는 인스턴트식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열 살이든, 여든이 되든 진짜 사랑을 찾길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애는 좋은 거다.

글. 릴리슈슈(kan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