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두고 어렵다, 어렵지 않다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이 오갔지요. 또 우리가 왜 시를 어렵게 느끼는가에 대해서도 지겨울 만큼 여러 이야기가 있었구요. 그래서 저는 그냥 제 멋대로 읽어버리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시의 세계에서 어떤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설령 오독으로 인해 작별하게 될지라도, 모든 연애가 그렇고 대화가 그렇듯 언제나 우리의 시작은 오독일 테고 결국 오독으로 끝이 날 테니까요. 다만 운이 좋다면 그 낭자한 오독의 폐허 속에서 우린 또 다른 오독을 시작할 수도 있거나, 잔인하지만 ‘다정’한 위로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김행숙 시집 <이별의 능력>에서 ‘다정함의 세계’ 문학과 지성사

김행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1. 이토록 따뜻하고 잔인한 다정함이라니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지만 우린 언제나 시간이 지나면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고 떠나야 합니다. 더 있고 싶어서, 때론 흐물거리는 발과 무릎으로 주춤주춤 시간을 붙잡기도 하지요. 아쉬움에 작은 목소리로, 더 작은 목소리로, 마침내 투명해질 때까지. 이별의 시간에 다정함은 아쉬울수록 잔인해집니다. 그리고 우린 쑥스러울 정도로 투명해지고 마지막 시간은 점점 다가옵니다. 결국, 정지한 것 같던 그 시간에도 돌고래가 솟구쳐오르지요.

2. 예술은 익숙한 순간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합니다. 김행숙 시인의 시들이 그러한데요. 김행숙 시인은 1999년 등단 이후 시집 <사춘기>와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를 냈습니다. 새로운 시 읽기 방법을 만들었다라고도 평가 받는 그녀의 시는, 마치 느낌의 조각들을 모아 백지 위에 압착해서 만든 콜라쥬를 보는 것 같습니다.

3. 저는 시를 읽을 때 보통 제목을 가장 나중에 읽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덤벙대는 성격 탓일 겁니다. 또 시인들이 대게는 제목을 가장 마지막에 붙일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시를 읽고 (제목을 읽지 않아서) 처음엔 제목을 ‘쪽팔림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사람들 앞에서 퍽! 넘어진 시인이 쪽팔림에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행인1이 묻습니다. “괜찮아요?” 시인은 말합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인사를 하겠지요. ‘안녕'(하세요) 하지만 부끄러움에 한쪽 귀는 투명해져 버립니다. 그리고 수평선이 솟아오릅니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요? 반짝거리는 무릎으로 어느 순간 시인은 행인1에게 한없이 다가갑니다. 시작에 대한 예감, 또는 감정이 돌고래처럼 솟아오릅니다.

4. 저에게 시는 어렵습니다. 시를 읽으면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시의 목소리는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울고 있는 건지 헷갈립니다. 나중에는 이거 혹시 외계어나 암호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어요. 도무지 뜻을 모르겠고 결국엔 이런 걸 왜 읽을까 하다가 지겨워져서 금방 시집을 덮어버립니다. 시는 짧아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시를 두고 어렵다, 어렵지 않다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이 오갔지요. 또 우리가 왜 시를 어렵게 느끼는가에 대해서도 지겨울 만큼 여러 이야기가 있었구요. 그래서 저는 그냥 제 멋대로 읽어버리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시의 세계에서 어떤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설령 오독으로 인해 작별하게 될지라도, 모든 연애가 그렇고 대화가 그렇듯 언제나 우리의 시작은 오독일 테고 결국 오독으로 끝이 날 테니까요. 다만 운이 좋다면 그 낭자한 오독의 폐허 속에서 우린 또 다른 오독을 시작할 수도 있거나, 잔인하지만 ‘다정’한 위로를 얻을 수도 있겠지요.

5. 그렇기 때문에 ‘다정함의 세계’는 다시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한없이 다가가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한없이 투명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지요. 하지만 언젠가는 이별을 하고 우리의 ‘다정함의 세계’는 환상처럼 녹아서 현실의 폐허를 드러낼 겁니다. 그리고 그 현실의 냉정함 앞에서 다정함은 오히려 잔인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이별하는 순간 어느 때보다 한없이 서로에게 가까워짐을 느낄 것입니다. 아쉬움이 자각하게 해주는 이별은 그렇게 우릴 서로에 대한 ‘가능성의 세계’로 이끌어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