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에 석양이 깔린다. 멀리서 말발굽의 다그닥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커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멀쑥한 백인 카우보이의 얼굴이 아니다. 꾀죄죄한 한복을 입은 고통 받는 백성, ‘군도’의 모습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영화 ‘군도’는 이렇게 서부영화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주제와 구성방식은 서부영화가 아닌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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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 웨스턴’ 장르는 이탈리아식 서부영화라는 뜻으로, 미국 서부영화에 대한 반발심으로 탄생했다. 서부영화에서는 백인 카우보이가 완벽한 악당을 처결한다. 뚜렷한 선인인 백인과 완벽한 악인인 유색인종과의 대립을 통해 백인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와 달리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서는 유색인종이 주로 주인공이다. 그렇다고해서 백인이 절대적 악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각각 등장인물마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정의를 위해 또 다른 정의와 싸워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두 장르는 말을 타는 황야라는 공간적 배경은 같지만, 어떤 영웅을 그리는지에 대해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가 한국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신호탄은 2008년에 개봉한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하 놈놈놈)이다. 이 영화는 1930년대 만주벌판을 달리는 총잡이의 모습을 묘사해, 언뜻 보기에는 미국 서부영화와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뚜렷한 백인 영웅이 아닌, 3명의 주인공이 각각 자신의 목표를 위해 활약하는 모습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이야기 구조와 가깝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놈놈놈’을 서부영화가 아닌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의 한국판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놈놈놈’이 시작한 한국식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는 650만 명의 관객 수를 동원하며 순항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 바통을 ‘군도’가 이어받았다. ‘군도’의 전개방식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와 비슷하다. 일단 악역인 조윤(강동원)은 서자다. 그는 출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산을 긁어모은다. 악랄한 수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했지만 나름의 사연이 있다. 반대편에 선 도치(하정우)는 백성만도 못한 인간인 백정이다. 조윤은 도치에게 적자인 동생을 없애달라고 하지만 도치는 그 부탁을 거절한다. 조윤은 도치의 부모를 죽이고, 도치는 조윤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누게 된다. 백인 카우보이가 아닌 인간 백정 도치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이다. 마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서 흑인이 저항하는 것처럼, ‘군도’에서도 사회적 하층민이 힘을 키워 자신을 괴롭히던 권력자를 처단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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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넘쳐 버린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가 되었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것이 문제다. 두 주인공인 도치(하정우)와 조윤(강동원)의 사연만 담겨있지 않다. 조연으로 나오는 8명 각각의 사연도 보여준다. 넘치는 스토리를 화면이 따라가지 못한다. 억지로 내용을 연결하려다 보니 곳곳에 내레이션까지 삽입했다. 각각 나름의 사연을 보여주자는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 특성에 매몰된 기분이다.

석양이 지는 화면과 서부영화 특유의 OST는 영화 ‘군도’가 사극이 아닌 웨스턴 장르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때 들려오는 내레이션과 정신없이 오가는 각 인물의 사연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몰입도를 저해하고 있다.

비단 ‘군도’ 뿐일까. 블록버스터 ‘디워’, 재난영화 ‘타워’ 등 외국 장르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 사례들이 많다. 정작 중요한 스토리와 몰입도는 신경 안 쓴 채 장르별 특성으로만 구성된 영화는 쉽게 외면받는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괴물’, 재난영화 ‘해운대’처럼 장르는 장르로만 활용하고 그 안에 단단한 스토리를 넣은 작품은 살아남았다. 

 

화려한 영상미, 그리고 일반인들의 수수한 이야기를 다룬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는 매력적인 장르다. 하지만 장르는 장르에 불과하다. 단단한 스토리와 몰입도로 ‘군도’를 뛰어넘는 코리안 스파게티 웨스턴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