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랭크>는 영리한 영화다. 예고편이나 포스터에서 예측할 수 없던 요소를 건방지듯 던지다가도, 유머가 이야기의 바탕임을 시종일관 내비친다. 영화가 흐를수록 탈의 표정은 평범해진다. 특이한 모습에 관객이 적응한 것이기도 하고, 이야기가 프랭크를 ‘보통’으로 만들어가는 까닭도 있다. 로드무비로서 서사를 도입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동네에서 숲으로, 다시 도시로, 그리고 개인에서 팀으로 그들은 옮겨다닌다. 

 

두 명의 주인공, 탈을 쓴 프랭크(마이클 패스벤더)와 존(돔놀 글리슨)은 머리에 쓴 탈의 유무가 아닌, 음악 재능의 유무로 영화 내내 비교되는 인물이다. 프랭크는 만화 주인공 혹은 영화 예고편의 내레이터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어떠한 상황에서 탈을 벗지 않는 프랭크 덕분에 관객은 존을 격려하거나 칭찬하는 그의 말투에 집중하게 된다. 앨범 녹음을 위해 각종 훈련을 하거나, 담소를 나눈 뒤에도 프랭크와 존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여기서부터 흥겨운 포스터와 예고편의 ‘콩깍지’는 벗겨진다. 이유는 단 하나, 음악이 ‘구리기’ 때문이다. 흔쾌히 존을 팀의 일원으로 받아준 프랭크가 결국 존의 음악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는 점이 슬며시 드러난다. 영화의 마무리에서 그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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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랭크> 스틸컷

 

 

이방인, 특이한 외양이 아닌 특이한 내면

 

프랭크의 인식세계에서는 은하계와 코카콜라가 한 무대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출 수 있다. 재기발랄한 가사는 영화에 오히려 냉철하게 반영된다. 가사를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프랭크다. 나머지 멤버들도 악기를 쥐고 조율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주체는 큰 탈을 쓰고 눈을 부릅뜬 사내, 프랭크 딱 한명이다.

 

이들은 음악가의 조건을 음악 그 자체라고 여겨왔다. 반면 존은 ‘기믹’이 필요하다고 믿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췄다. 그가 밴드를 살리기 위해 여러모로 궁리할수록 오히려 그의 음악적 무능은 부각된다. SNS를 통해 이 밴드를 접한 사람들은, 실제로 만난 뒤 몇 분 되지 않아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이들의 존재는 그들의 발음하기 어려운 밴드 이름 만큼 흐릿하다. 스크린에 선명하게 등장하는 SNS 화면은 그래서 역설이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 속 ‘트잉여’ 였던 존은 점점 많은 구독자를 갖는다. 영화는 SNS의 역할을 과대평가 할 수 밖에 없도록 관객을 속인다.

 

프랭크에게 그 둥글넙적한 탈이 늘 얼굴이었지만, 존이 클럽에 들어선 순간부터 밴드와 프랭크는 이뤄야만 하는 ‘목표’다. 멤버들이 맞닥뜨리는 ‘별 것 아닌 것들’과 차례대로 벌어지는 사건은 존이 밴드를 위해 도모한 일들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 사고뭉치 밴드의 공고한 기반이 부각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타의에 의해 천천히 모든 것을 부수고, 스스로 합치도록 이끈다. 프랭크 일당은 팀은 만들었지만 ‘밴드’는 되려하지 않는다. 세상이 말하는 밴드가 되고자 하는 존은 이방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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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을 관람하고 있다는 착각

 

감독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인물들은 저마다 겹겹의 가면을 쓰고 벗기를 반복한다. 프랭크를 ‘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이 점차 깨져나가는 이유다. 뛰어난 재능을 선망하는 동료 돈(스쿳 맥네이리)는 프랭크를 늘 믿고 따르지만, 자신의 여린 정서는 보호하지 못한다. 그에게 프랭크가 둘도 없는 정상인이었던 이유는 뛰어난 재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기를 병적으로 꺼리는 클라라(메기 질렌할)는 아마도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프랭크에게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있는 공연을 없다고 말하거나, 절대 유명해질 수 없을 노래만을 고르거나. 프랭크가 탈을 쓰게 된 사연 역시 영화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어느 순간에는 영화의 제목으로 프랭크가 아닌 ‘존’이 더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프랭크는 결국 용서를 구하듯 노래를 부른다. 지난 시간의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다. 18개월간 머물렀던 아일랜드의 우거진 숲처럼, 순리를 거치듯 그들은 다시 운명공동체가 된다. 프랭크와 그 일당은, 어쩔 수 없는 것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정말 존의 ‘정신병원’이다. 겨울바람 속에 사라졌던, 욕지거리를 하면서 집어치웠던 그의 악상처럼 말이다. 곡이 될 수 없는 멜로디와 밴드가 될 수 없는 존은 같은 처지다. 그가 ‘친칠라’를 볼 때마다 떠올릴 기억은 뿌듯함일까, 쓸쓸함일까.

 

 

글/ 블루프린트 (41halftim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