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이슈팀의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텍스트를 소개하려합니다. 공부합시다!

이번 청년연구소는 청년문화에 관한 연구다. 소영현 씨의 <한국사회와 청년들: ‘자기파괴적’ 체제비판 또는 배제된 자들과의 조우>는 80년대, 90년대 그리고 00년대까지 청년문화의 연구를 정리하고 00년대 청년문화가 간과했던 새로운 전망을 00년대 한국문학에서 찾아 나선다.

 

정치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로, 문화의 시대에서 경제의 시대로

청년, 주체에서 대상으로

 

저자는 80년대를 정치의 시대로, 90년대를 문화의 시대로 규정한다. 80년대와 90년대 모두 청년이 사회변화의 흐름을 만들거나 증폭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청년문화는 (대)학생들의 학생운동 문화로 요약된다. 학생운동 문화는 저항의 구심점으로 관심받았다.

 

90년대로 넘어가면서 학생운동은 동시대성을 잃어버린다. 학생운동 문화가 더는 새로운 청년문화를 담아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시대의 기수는 소위 ‘X세대/신세대’가 차지한다. 저자는 90년대의 청년문화를 취향, 생활양식, 스타일을 통해 획일적인 세계관에 저항한 문화였고,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했던 기성세대/윗세대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던 반문화였다고 말한다.

 

1997년 IMF 사태는 한국 사회를 “문화의 시대”에서 “경제의 시대”로 변모시켰다. 자유롭게 자아/정체성/개성을 찾던 청년들은 생존을 위해 자기를 계발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21세기 첫 십 년 동안 청년문화라고 할 만한 것은 더이상 존속할 수 없어졌으며 모두가 생존의 최전선에 내몰리게 되었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청년세대가 보수화되고, 취향도, 의욕도 없어진 속물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사회에 상상력과 그 상상을 위한 실행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수동적 인간이다.

 

 

청년세대에 대한 질타 혹은 이해, 위로 사이에 놓인 공백

 

기성세대의 무지하고 일방적인 평가에, 우석훈과 박권일은 ‘88만원 세대’에서 청년문제는 (청년이 원인이 되는)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상황이 원인이 되는) 사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당사자인 00년대 젊은이들도 기성세대의 낙인에 반발하며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경청할 의무 대신 고함칠 권리를! ⓒ고함20

(아쉽게도 연구에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고함20 또한 20대의 자기 발화를 위해 생겨나고, 오늘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매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대응책이 청년 세대를 ‘이해’하는 데 그쳤을 뿐이고, 그러한 이해의 연장선 상에서 멘토링과 힐링이라는 선도와 치유의 ‘대상화’가 진행되었다고 본다. 저자는 청년을 외적으로 규정하는 것, 그 시선에 반기를 드는 것. 모두가 간과한 공백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00년대 한국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2000년대 이후의 청년 문학, 그 사이에서 찾은 “새로운 전망”

청년과 철거민, 두 사회적 배제자들의 연대

 

2000년대 이후 문학 역시 청년이 “미래를 선취(해야)할 존재가 아니라, 그저 우리 사회의 배제된 자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현실에 순응하거나 동의하는 방식 외에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걸까. 저자는 이 질문의 답을  황정은의 ‘양산 펴기(소설집 “파씨의 입문” 중에서)’에서 포착한다.

 

두 개의 목소리, 양산 판매 알바생과 철거민들의 목소리는 이렇게 따로 들리다가 

이윽고 하나의 문장(아래 인용구 참고)으로 합쳐진다 ⓒ창비


 

소설 속에선 양산을 파는 청년의 목소리와 노점상 철거민 집회 구호가 합쳐져 마치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웬말이냐 자외선 차단 노점상 됩니다 안 되는 생존 양산 쓰시면 물러나라 기미 생겨요 구청장 한번 들어보세요 나와라 나와라 가볍고 콤팩트합니다 방수 완벽하고요.” 저자는 이는 새로운 방식의, 새로운 조합의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과거 유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낙원을 꿈꿔야

 

한 철학자는 19세기는 유토피아를 계획했던 시기로, 20세기는 그 계획을 실현했던 시기라고 썼다. 그리고 2013년 겨울, 그는 한국에서 “멈춰라, 생각하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말처럼 21세기 청년들은 다시 19세기처럼 돌아가 유토피아를 생각/기획해야 한다. 이 일은 어쩌면 19세기보다 더 힘든 작업일지도 모른다. 아니, 힘들 것이다. 19세기의 유산은 아직도 공고하고, 21세기 청년들은 굶어 죽는 사람도, 주적도 없는 ‘(보기엔 좋은)낙원’에서 태어났다. 19세기의 여러 기획들을 빼고 세상을 생각하긴 힘들고, 보기엔 좋아 보이는 낙원에선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는 더이상 회사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는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 김사과 ‘정오의 산책’

 

새로운 사회적 기획의 시작은 불가피하다. 청년들은 이미 알고 있다. 사회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것도, 청년연대나 청년노조의 연대도 모두 한계가 있다는 걸. 저자가 힘주어 말한 ‘배제된 자들 간의 조우’, 이는 물론 현재를 더 낫게 만들 순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서 많이 본 서술과 사회 운동 방식이 아니었던가? 과거의 방식으론 세계를 바꿀 수 없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몇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반란이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게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보자.


ⓒ설국열차(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