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저녁 즐거운 마음으로 공연장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관중들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을 목격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보통 인간처럼 규칙적인 호흡을 내뿜고 꼿꼿이 서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원통 모양의 뼈로 이루어진 통통한 살색 팔이 보였고, 그 위에 셀카봉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한 개의 셀카봉이 눈앞에 맥없이 허위적거리고 있었다.’


-<변신>, 2014







대포, 폰카 그리고 셀카봉이 난무하는 아수라장 ⓒMnet ‘MAMA 2014’





공연장 풍경의 ‘변신’. 폰카 불빛이 등장하더니 어느 순간 대포 같은 망원렌즈로 무대 위를 펑펑 찍어대는 DSLR이 등장했다. 그리고 최근엔 최종 보스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폰카의 무시무시한 진화 버전인 셀카봉이다. 공연장 풍경의 변신은 공연장 바깥세상의 변신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SNS가 급속도로 확산시킨 ‘인증’문화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것을 했다는 증거.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사건을 찍고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어딘가에 올림으로 이 사건을 경험했다는 알리바이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인증에 대한 욕망은 내 앞에 연예인이 있을 때 더욱 분출된다. 나 또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앞에 있는 연예인에게 폰카를 들이대고 싶은 욕망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나 그것이 팬심으로 티켓팅을 하고 그 티켓을 내고 들어간 공연장일 경우는 인증에 대한 욕망의 샘이 솟아난다. 




공연장은 결코 그 욕망을 마구잡이로 분출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공연을 가는 동기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개 생음악을 듣고 보겠다는 동기를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생음악을 ‘듣’겠다는 욕구는 종종 인간의 가청음역 초과할 것 같은 익룡 소리(자매품: 돌고래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와 방해받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이 스탠딩석 어디에 있든, 당신의 키가 얼마든 상관없이 쉽게 충족할 수 있는 욕구다. 생음악을 ‘보’겠다는 욕구는 그렇지 않다. 시각적인 욕망은 스탠딩 번호나 신체적인 조건에 따라서 실현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깨끔발을 들고 요리조리 머리숲을 피해 열심히 고개를 돌리다 보면 시각적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켜 볼 순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있다. 인증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최대치로 채워넣으려는 사람들의 팔이다. 그 사람들이 폰카를, DSLR을, 셀카봉을 있는 힘껏 들어 안 그래도 좁은 시야를 막으면, 안 그래도 숨이 턱턱 막히는 스탠딩석에서 기분까지 혼탁해진다. 공연은 나와 무대 위 아티스트, 두 존재만의 사건이 아니다. 무대는 무대장치를 넘어 스탠딩석까지 뻗어있다. 스탠딩석도 무대의 일부고, 무대 위 경험뿐만 아니라 관중석 안에서의 경험도 공연에 대한 총체적인 만족도에 영향을 준다. 나 또한 아티스트와 함께 이 공연에 대한 다른 관객의 기억에 변수가 되는 것이다. 




인증샷은 몇 번의 셔터질로 충분하고, 정말 참을 수 없으면 당신의 얼굴 앞에서 열심히 셔터질을 하는 것만이 당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다. 당신이 힘껏 든 팔이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무대에 먹칠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추신. 셀카봉이 왜 셀카봉이겠는가. 원래 이것은 짧은 팔의 한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과 셀카모드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용도로 개발된 거다. 셀카봉을 쓰면 누군가는 사진을 찍어주느라 사진에 자신의 얼굴을 박지 못하는 소외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 셀카봉은 이러한 배려와 우정의 마음에서 등장한 거다. 연말 공연철에는, 그리고 신년에는 스탠딩석에 우뚝 솟아오른 셀카봉충들이 멸종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