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고 짓고. 매일 변하는 서울은 사뭇 도시 시뮬레이션 게임 심시티를 연상시킵니다. [심시티:서울]은 건물이 게임처럼 쉽게 철거되고 건축되는 대한민국, 서울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법을 앞세운 건설사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간단하게 사람들을 몰아내고 무시합니다. 도시는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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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이 건물을 철거할까요?” “예” 건물은 깔끔하게 지워졌다. 불꽃이 터지고 건물의 가치는 수치화 된다. ⓒ심시티 캡쳐

 

도시는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게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 합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들도 힘을 행사할 때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할수록, 장사가 잘 될수록 두려움은 커져갑니다.”

안암골에는 델마르라는 카페가 있었다. 델마르는 자몽빙수와 쑥빙수가 맛있어서 인기가 많았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억을 축적했다. 지난 여름방학 델마르에 현수막이 걸렸다. “고대학우 여러분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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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커뮤니티 고파스에 올라 온 사진

델마르의 이진원 사장은 2011년 2월 16일부터 2014년 2월 15일까지 보증금 2천에 월세 160만 원으로 임대차 계약을 했다. 하지만 2년 뒤인 2013년, 건물주가 바뀌었다. 델마르는 상가임대차법에 보호 대상이기 때문에 최소 보호 기간인 5년 동안은 건물주가 델마르를 맘대로 내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인은 예외조항을 들어 계약 연장 요구를 거부했다.

주인은 건물을 원룸 건물로 재건축한다고 말했다. 법은 재건축하는 경우 영업 기간 5년을 보장해주지 않아도 좋다고 규정했다. 협상 과정에서 주인은 완공되고 다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지만, 함께 제시한 임대료는 지금보다 1.5배 높은 금액이었다. 주변 건물 시세보다 1.2배 높은 금액이었다. 시설비용으로 1억 5천만 원을 들인 가게를 두고 내몰리듯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주인은 한 푼도 배상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건물주는 델마르를 비롯한 같은 건물에 세들어 있던 가게 주인에게 명도소송(건물을 점유, 사용하고 있는 사람에게 점유를 넘겨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거기엔 개업한 지 5개월밖에 안 된 ‘콩진호’도 포함돼 있었다.

 

 

“당신이 내쫓는 건 상가뿐 아니라 학생들의 추억…☆”

고려대학교 커뮤니티 ‘고파스’에 지난 9월 12일 델마르 건물의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은 안타까워했고,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이들을 위한 연대 사업을 시작했다. 총학은 “재건축의 공포라는 유령은 이제 홍대, 가로수길, 강남을 거쳐 안암에서도 떠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합법입니다. 과연 이것은 합당한가요?”라며 상가임대차법의 예외조항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붙인 대자보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자 총학은 학교 주변 참살이길, 개운사에 현수막 등을 걸어 상인들에게 힘을 보탰다. 고연전 시즌이 되면 안암골에 현수막을 거는 전통에서 착안했다. 안암골 상인들은 그동안 고연전 기간이 되면 현수막을 거는 데 쓰이는 응원단 비용을 지원했고, 시끄러울 수 있지만 학생들의 문화였던 기차놀이 등을 마음껏 즐기도록 배려해줬다. 총학은 그간 소비자로서 받아 온 혜택을 갚는 것과 더불어 안암골 이웃으로 연대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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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고대 총학의 안암 상가임대차분쟁 연대 사업 포스터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홈페이지

(오른쪽) 고대 총학이 게시한 현수막 사진 ⓒ구메

총학은 이 일을 알리기 위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는 건물주 대리인도 있었다. 연대 시작 16일 뒤인 10월 31일 총학은 “세 개 상가의 임차인들이 건물주와 만나 차례로 합의에 성공했다. 목적대로 5년간의 영업기간을 보장받지는 못했지만 단 한 푼도 배상해줄 수 없다던 건물주의 마음을 학우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연대 사업에 참여했던 고대공감대 권순민 정책국 부국장은 “델마르 폐업 소식을 듣곤 임대인은 약자니까 연대해야 된다는 식으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건을 구체적으로 알게되니 강자-약자 문제라기보단 옳고-그름의 문제였다. 법이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강자의 편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안암동이 홍대앞이나 서촌, 경리단처럼 느낌있는 거리도 아니고, 아직까지는 부동산 안전지대 같지만 자본, 기획부동산의 욕심은 끝이 없기 없다”며 홍대앞, 서촌, 경리단  이후에는 대학가인 안암동을 다음 타깃으로 지목했다. 

 

두리반, 가장 성공한 ‘몫 없는 자들의 반격’ 

아무리 사정이 딱하더라도 법대로만 해결하려 했다면 아무것도 돌려받을 수 없던 델마르였다. 하지만 안암동이라는 지역으로 묶여진 공동체가 델마르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준 까닭에 법이 실현하지 못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례 중에는 안암골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보기 어려운 지역도 있고, 그렇게 볼 수 있는 지역도 있지만 ‘몫 없는 자들의 반격’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이 이뤄진 대표적인 지역인 홍대앞 두리반 사건이었다. 

동교동 167번에 있던 칼국수 집 두리반에 2007년 12월 명도소송장이 날라왔다. 두리반이 오픈한 지 횟수로 2년, 마포구가 그 일대를 두고 지구단위계획 발표한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그 지역을 매입하던 GS 건설과 남전디앤씨는  두리반 주인인 안종녀 씨와 그의 남편 유채림 씨에게 두리반을 떠나라고 했다. 두리반은 법정싸움을 벌였지만 법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재건축을 두고 사용할 수 없었다. 용역은 2009년 12월 24일 두리반을 뒤엎었다. 터전은 엉망이됐고, 그들은 쫓겨났다.

부부는 이틀 뒤인 26일 두리반에 다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531일의 농성 기간 동안 두리반은 칼국수집에서 폐허로, 폐허에서 새로운 예술, 새로운 정치의 실험장 혹은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충돌하는 공간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인디 음악가들은 ‘51+’라는 페스티벌을 열었고 지속 가능한 음악생활을 위해 ‘자립음악생산조합을’ 만들었다. 시인들은 ‘불킨 낭독회’를 열었고, 소설가였던 두리반 주인의 남편 유채림은 ‘매력만점 철거 농성장’을 썼다. 영화감독 정용택은 ‘파티51’을 찍었고, 시각 예술 공동체 리슨 투더 시티는 ‘두리반 도시 영화제’를 기획했다. 농성은 2011년 6월 8일 남전디앤씨와 “시행사는 두리반이 홍대 지역에서 다시 영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한다”라고 합의하면서 성공했다.  

“두리반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실패자들이 두리반을 예술로서 생명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균열, 사막의 오아이스 두리반. 그 속에서 서울을 살아있게 하자.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의 이웃.”

 

-리슨 투 더 시티, ‘두리반 도시 영화제 – 도시의 보이지 않는 자들이 만드는 균열’

 

 

“두리반은 철거민의 투쟁에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을까?”

 

-심보선, ‘두리반, 자립 의지의 거점’

 

용산, 두리반 등 세입자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임대차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국회의원들도 여야 할 것 없이 상가임대차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 개정안들은 작년 정기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당장 생계가 끝날 위기 앞에서 법의 변화를 기다리기란 불가능하다. 개정안이 어떻게 통과된다 하더라도 재산권은 그 어떤 권리보다 단단해 법적으로 몫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몫을 인정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제n의 델마르, 두리반은 여전히 수면 밑에 잔존한다. 

법 밖에서 “몫 없는 자들”이 연대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도시. 이곳에서 성공한 투쟁인 ‘두리반 사건’은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을까?” 

두리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파티51의 정용택 감독은 “두리반 같은 장소가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며 “그런 사례가 만들어졌으면 좋긴한데 쉽지 않은 모델이다”라고 답했다. 지난 12월 18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파티51 GV에서 그는 “두리반 이후에 보상을 받아낸 사례가 몇있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던 상가여서, 건설사를 상대로 보상을 받아낸 두리반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두리반처럼 다른 곳에서도 문화와 결합한 농성이 성공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용산에서도 문화적인 농성을 했었지만 참사 이후에 안전이 확보된 장소여서 가능했었다. 두리반의 경우는 유채림 소설가가 한국작가회의 회원이였기 때문에 마포경찰서 정보과에서 용역들이 두리반에 강제 집행하는 것을 허가 하지 않았다. 그후 홍대앞 음악가들이 51+라는 대형사고를 치면서 더욱 공격하기 힘든 공간이 되어 버렸다. 한국작가회의 같은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없었다거나, 홍대가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일어나기 어려웠던 농성이었다”

건물주의 자본이 크면 클수록 저항의 성과를 보긴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요구사항이 관철됐더라도 용역들이 상처를 남긴 후였다. 

카페 마리는 명동 개발지구 3구역에 있던 장소로 그곳에는 터전을 잃은 사람이 모여 연대하고 저항하는 장소였다. 오마이뉴스 고영철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명동 개발지구의 시공사는 대우건설이었고 시행사는 대우 건설이 44%의 지분을 갖고 있는 (주)명례방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이었다

마리의 이야기는 파티51에도 나온다. 뮤지션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두리반에서도 마리에서도 자유롭게 ‘돈만 아는 저질’을 부르지만, 카메라는 마리에서 공사 현장을 지키는 용역의 눈초리를 추가적으로 기록한다. 두리반에서 자유롭게 공연하던 밴드 ‘밤섬해적단’ 드러머 권용만은 용역과 대치하다 용역을 때렸다며 경찰은 그를 경찰차에 태운다(그는 후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마리는 두리반보다 더 큰 자본에, 재개발 계획에 속했었고, 두리반 같은 네트워크도 없었다.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 틀림없이 여기쯤인데/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 작은 집이 있었는데”

 

-3호선 버터플라이,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

 

연대라는 해결책은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손쉬운 답변이다. 동시에 불충분한 답변이다. 연대하더라도 두리반보다는 마리처럼 같은 경우가 많다. 이쯤 되면 두리반은 모든 상황들이 맞물려서 만들어진 일종의 행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연대는 여전히 유효한 해결책이다. 법이라는 강력한 발판 밖에서, 법을 간편하게 무시할 수도 없는 몫 없는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연대의 여부나, 그 희망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방향성이다. 

지난 11월 5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홍대앞 두리반 이야기 대담회가 있었다. ‘홍대앞 문화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공론의 장’이라는 부제가 달린 제1회 홍대앞문화연구포럼의 일환이었다. 그날 대담회엔 두리반 투쟁에 참여했던 뮤지션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과 대중문화평론가 차우진 weiv 편집장이 참여했다. 

차우진 편집장은 “연대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한국에서는 지역 공동체에 대한 접근을 다르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10년 정도 지나면 ‘자이세대’라고 영등포 자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전주 자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생길 거다. 마을은 이미 없어졌다. 우리는 한 공간에 10년 살지 않는다. 서울은 사는 도시라기보다 잠깐 머물렀다 떠나는, 일하는 도시지 않나?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다 흩어져 있음에도 공통적인 정서로 연결되어 있다. 3호선 버터플라이가 노래하는 ‘가보니 흔적도 없네’같은 정서다. 이렇게 연결되있다는 것을 알고, 굳이 장소적으로 함께 있지 않아도 너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를 계속해서 실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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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6일의 서교지하보도 사진. 서교지하보도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 그 위엔 버스중앙차로가 생겼다. ⓒ요한

 

젠트리피케이션도, 이에 저항하는 행동도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지구멸망이 늘 터무니 없는 음모론과 굴욕적인 예측 실패로 결론 나듯, 연대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은 외려 우습다. 여러 순간들이 충돌되면서 언제 두리반같은 사례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극적인 장면을 기다린다고 해서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마른 땅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두리반 투쟁 역시 투쟁에 참여했던 아티스트 중 일부는 서교 지하보도 철거에 저항하며 그곳에서 공연하던 이들이었다. 저항 뒤에는 또 다른 저항이 있었다. 
땅도 건물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장소를 사랑하는 우리. 그곳에 대한 애정이 있는 우리’에게’ 움직이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그들은 움직이지 않으니 우리’가’ 그곳에 다가가야 한다. 법이라는 단단한 후원자를 안고 우리’의’ 거리를 지킬 수도 있겠지만, 법은 더디게 변하고 그간 인정해주지 않았던 (재산권이 아닌) 새로운 권리들, 즉 추억에 대한 권리, 기억에 대한 권리를 쉽게 인정해주지 않을 거다. 한받 씨는 앞선 대담회에서 “뭉클한 순간이 모여서 씬이 된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행동과 동시에 연대하면서 ‘뭉클함’을 전파하고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곳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우리들 ‘뿐’이니까.

[심시티:서울] 시리즈

① 홍대앞, 떠도는 기억들

② 서울 시티, 최적의 개발환경

③ “몫 없는 자들”의 반격

(디럭스ver.) 대학생, 상가재건축분쟁에 ‘이제는’ 나서야 하는 이유

글. 릴리슈슈(kan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