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창 밖에서 항상 같은 풍경을 마주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 속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설익은 르포]는 당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혹은 잊고 지낸 세계를 당신의 눈앞에 끄집어낸다. 낯설거나 익숙하거나, 그것들과 함께 일상 속의 작은 일탈을 시작해보자.  

여인숙. 우리나라 숙박시설의 일종인 여인숙은 80년대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공단 근처나 도심의 변두리에서 간간이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관업도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여관업의 1세대인 여인숙이 설 자리를 점차 잃게 된 것이다. 이 때문일까, 여인숙에 묵는 이들 역시 바뀌었다. 서울의 유명한 공단인 구로공단에서는 이주노동자가 여인숙의 주 고객층으로 부상했다고 한다. 구로공단에서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의 이야기를 통해 여인숙과 여인숙에 오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구로로 향했다.


구로에 가다


오후 4시 반, 구로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밖에 중국어로 된 간판이 있는 식당이 많아지고 있을 무렵. 구로구에 위치한 남구로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는 높은음의 중국말이 섞여 들려왔다. 간간이 중국 동포의 대화도 들렸다. 사람들은 익숙한 듯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자는 그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저층 건물이 앙상하 칠이 벗겨진 채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가 부산하다. 저가 의류 상점 앞, 의류 매장도 모자랐는지 보행도로에까지 옷걸이에 옷을 잔뜩 걸어 놓고 ‘만원’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그 옆에는 옷이 잔뜩 담긴 박스가 무심히 놓여있다. 이리저리 거리에 있는 각종 홍보물을 피해 여인숙이 있을 법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큰 거리에는 여인숙이 보이지 않았다. 깊숙이, 꼬물꼬물한 골목을 따라가니 여인숙이 보인다. XX 여인숙. 간판에는 목욕탕 마크(♨)도 있다. “저 마크는 왜 있는 걸까?” 궁금했다.


 

“어쩐 일이야?” 팔순의 주인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머니는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라는 듯, ‘관리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방으로 기자의 팔을 끌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방은 작았다. 여인숙에 누가 오는지 볼 수 있도록 창살이 있는 작은 창문이 있었고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텔레비전은 낡았는지 제대로 된 색감을 잃은 듯 했다. 발끝으로 한기가 전해져 발을 모은 채 서있었다. “춥나? 전기장판 켜져 있는 여기로 와요” 두 사람 겨우 앉을 수 있는 방에서 전기장판의 미미한 온기에 의존한 채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 여인숙


주인 할머니는 1968년에 여인숙을 차렸다고 했다. 도시화, 공업화로 인해 여관업이 성행하던 때였다. 60년대 대부분의 여인숙은 공동화장실뿐이었고 침실이 없는 곳이 많았다. 남구로에서 처음으로 주인 할머니가 각 방마다 개인화장실과 침실을 배치했단다. 할머니는 “나름의 운영전략이었다”며 개업했던 그때를 자랑스러워했다. 할머니의 여인숙이 설계를 바꿔 개업한 이후, 인근의 ‘여인숙’과 ‘장’은 개인화장실과 침실을 하나 둘 갖추기 시작했다. 본래 여인숙은 개인 화장실이 없다고 인식됐기 때문에 “개인 화장실이 있어요”라는 의미로 간판에 목욕탕 마크(♨)를 넣었다고 한다. 여관업 1세대 여인숙과 이보다 발전한 2세대 ‘장’은 그렇게 갈 곳을 잃은 이들의 잠자리를 책임졌다.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서 80년대 초까지는 돈을 많이 벌었지. 박정희 대통령까지만 하더라도 통행금지가 있었잖아. 사이렌 울리면 통행할 수 없으니, 사람들이 뛰어서 몰려 들어오곤 했어. 그때 돈을 많이 벌었지”


야간 통행금지 제도는 1945년에 시행되어 1982년 1월 5일 부로 폐지되었다.

(사진)통금해제 1주년을 기념 홍보물 ‘자율과 질서 – 통금 없는 밤’ 캡쳐ⓒ국립영화제작소


“돈에 따라 잠자리가 정해지는 세상이야”


기자가 여인숙에 있는 동안 장기투숙객 두 명, 단기 투숙객 한 명이 머물고 있었다. 총 일곱 방을 운영 중이라는 설명에 의아했다. 외관상으로 봤을 때 방이 일곱개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규모가 작았다. 방을 구경시켜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할머니는 “뭘, 구경까지 해”라며 타박을 주곤 키를 들고 앞장섰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복도를 지나니 계단이 있었다. 할머니를 따라 올라선 계단은 올라간다고 하기엔 경사가 너무 높았다. 젊은 기자에게도 위험한 계단인데, 할머니에게는 더더욱 위험해 보였다. 계단을 등산하고서야 다섯 개의 방을 볼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침대가 있었다. 작은 방은 침대로만 꽉 차 있었다. 방 안에 있는 화장실로 이동할 수 있는 작은 틈만 있을 뿐이었다. 다른 방도 보여주겠다며 할머니가 키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짐을 가지러 간다고 하더만. 안 갔나봐. 몰랐어~” 할머니는 성급히 문을 닫았다. 할머니도 당황했는지 “짐을 가지러 간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말이야”라고 몇 번을 되냈다. 


방 구경을 마치고 할머니와 함께 관리실로 돌아왔다. 할머니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중국인이여. 일하러 한국으로 왔나봐. 일용직으로 일하는 사람인데 이틀째 인력시장에서 일을 못 구했나봐. 하루에 8만원을 버는데 그 돈으로 방 값 내고 버티고 있는거야.” 


구로는 몇 년 전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인력시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이들 중, 이주노동자의 상황이 제일 안 좋았다. 마땅히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없으니 짐을 싸서 이곳, 저곳을 떠돌고 있는 처지다. 그나마도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여인숙에서 묵는 이주노동자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남구로역 바로 옆에 위치한 여인숙은 공동화장실을 쓰도록 하기 때문에 그만큼 돈을 덜 받는다. 그들은 씻기를 포기해서라도 버스비용이 안 드는 역 근처 싼 여인숙에 묵어야 했다. 


“여인숙이 제일 하급이야. 규모도 작고, 하루 묵는데도 싸게 잘 수 있어. 공동화장실이 있는 여인숙은 1만 5천원. 여기처럼 개인 화장실이 있는 여인숙은 2만원이야. 여인숙보다 급이 높은 곳이 장, 그보다 높은 곳은 모텔, 또 그보다 높은 곳이 호텔이지. 호텔가서 자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받는다’고 표현하던데. 그,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호텔리어)도 엄청 많고 말이야. 깨끗하고 넓고 따뜻하고 좋겠지. 여기서 자는 사람들은 호텔에 안가는 게 아냐. 돈이 없어서 못가는 사람들이야. 작고, 춥고, 허름해도 어쩌겠어. 여기라도 없으면 잘 곳이 없는데. 돈이 사람의 잠자리를 정하는 세상이니까”

 

인력시장에 맞춰진 10분 빠른 시계


할머니의 기상시각은 항상 4시 30분쯤이다. 하루 일해서 하루를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주로 묵다 보니, 할머니의 일과도 그들의 삶에 맞춰져 있었다. 인력시장에 가기 위해서 4시 반에는 기상해야 하는데, 고된 노동을 한 그들은 도통 알람소리를 듣지 못했다. 때문에 노동자들은 할머니에게 4시 반에 깨워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간혹 할머니가 깜빡하고 4시 반에 깨우지 못했을 때나 10분이라도 늦게 깨우는 날이면 그들의 한숨과 분노를 하염없이 바라봐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들에게 인력시장은 절박했다. 간절함이 절망으로 바뀐 데에 오는 분노인 것 같다며, 이해 간다고 할머니는 담담히 말했다. “여기 시계는 항상 10분 빨라. 실제 내 기상시각은 4시 20분인 셈이지. 혹시나 늦게 깨우면 안되니까. 내 스스로 조심하고 있어”


여인숙을 둘러싼 공간, 치안의 사각지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가로수 전선이 어지럽게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여인숙과 장이 모여 있는 작은 골목길에 내린 어둠에서 빛이 되어줄 가로등은 딱 하나였다. 그마저도 깊숙한 골목을 다 비추진 못했다. 골목길 양 옆으로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게다가 주택은 콘크리트 담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담은 성인 어깨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담을 넘어 주택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쉬워보였다. 여인숙 밖의 풍경을 바라보자 할머니도 기자를 따라서 창문을 응시했다. 그리곤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5시 30분이지? 이제 슬슬 걔들이 올 시간인데, 처자 언제 집에 갈거야?” 할머니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이 공간의 특성 때문에 ‘걔들’이 자주 온다고 했다. 

여인숙은 대로변에 있지 않다. 구석진 골목길에 위치한다. 이런 작은 골목에 CCTV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구석지고 감시가 없는 곳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담배를 문 청소년들은 밤을 틈타 떼를 지어 여인숙이 모여 있는 컴컴한 골목을 찾아왔다. 담배를 피기도 하고, 소란스럽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심하면 절도를 일삼는 그들을, 누군가가 나무라기도 했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들이 다시 몰려와선 불을 붙인 종이를 여인숙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그 여인숙은 홀라당 타버렸다. 


할머니에겐 삶을 유지할 여인숙을 잃은 주인의 울음소리가 남 일 같지 않다고 했다. “하루는 내가 길게 나갔다 올 일이 있어서 여인숙을 비웠어. 그런데 걔들이 여기가 빈 걸 어떻게 알았는지, 들어와서 잠을 자고 있더라고. 가출을 했었나봐, 외출하고 돌아와서 걔들이 자고 있는 걸 눈으로 봤을 때 어땠겠어. 간담이 서늘했지. 그래서 여기서 여인숙을 하는 사람들은 집을 오래 못 비워. CCTV라도, 가로등이라도 좀 설치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좁은 골목에 설치가 안된다고 하니 어쩌겠어. 우리가 조심해야지”

할머니는 어서 가라고 재촉했다. “아유! 어서가!” 큰소리로 가라고 하시면서도 기자가 걱정됐는지 큰 대로변까지 기자를 배웅해 주었다. 대로변으로 나와서야 밝은 빛이 보였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전하고 몇 걸음이나 뗐을까. 남구로 시장에 도착했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건물마다 있는 ‘XX인력간판’이 환한 조명과 함께 밤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