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창 밖에서 항상 같은 풍경을 마주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 속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일까. [설익은 르포]는 당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혹은 잊고 지낸 세계를 당신의 눈앞에 끄집어낸다. 낯설거나 익숙하거나, 그것들과 함께 일상 속의 작은 일탈을 시작해보자.

 

 

올해로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다. 얼마 전에는 96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수십 년 전, 이 땅의 한쪽에선 잔혹한 일제의 수탈과 탄압이 행해졌고 다른 쪽에선 해방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지식인의 삶은 고뇌와 성찰, 끝없는 방황으로 얼룩져 있다. 특히 당대의 글쟁이들 앞에 놓인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다. 제 안위를 위해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쓰거나, 그럴 수 없어서 붓을 꺾었다. 시와 소설, 기사를 포함한 모든 글이 검열과 탄압의 대상인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문학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식민지 치하의 풍경과 이를 살아가는 삶을 그려냈다. 문인들이 느낀 슬픔과 분노는 작품 속 주인공을 매개로 세상에 알려졌다.

 

 

문학은 일상이다. 당신에게 낯설고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 소설에는, 사실 당신의 주변에 널려있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 특히 1930년대 식민지 작가들의 문학은 경성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아낸다. 혁명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진 그들은 경성 거리를 떠돌고, 또 떠돌며 고뇌했다. 이상, 박태원, 이태준, 염상섭… 그들이 배회한 경성은 지금의 서울이다. 80년의 세월을 넘어, 서울에 남아 있는 그들의 흔적을 마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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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성역

 

지하철 1호선 시청역과 서울역, 2호선 을지로입구역과 4호선 명동역은 서울 중심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울의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면 서울역에서 시청까지, 다시 명동 시내까지 걸어서 다닐 수 있다. 이 일대는 그야말로 ‘번화한 도시’를 상징한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끝없이 늘어선 거대한 빌딩 숲은 압도적이다.

 

이 거리는 1930년대의 지식인들에게도 ‘근대화’와 ‘신문물’을 상징했다. 20년대의 카프 문학이 내리막길에 들어서며 30년대에는 새로운 문학의 흐름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모더니즘 문학이다. 이상, 박태원, 이효석을 비롯한 경성의 모던보이들은 ‘구인회’를 조직하며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했다. 그들의 작품에는 근대화가 진행된 서울의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서울의 풍경에는 경성역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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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섰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이루움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 이상, <날개>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80여 년 전의 이상과 구보 씨가 그랬던 것처럼, 해가 질 무렵의 경성역 앞에 섰다. 지금은 ‘경성역’이란 이름 대신 ‘문화역 서울 284’란 이름을 달고 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본 구 서울역사는 서울이 아닌,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1925년, 스위스의 루체른 역사를 모델로 하여 르네상스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것이니, 그런 느낌을 받을 만하다.

 

경성역은 1900년에 건설되어 서울 대중교통과 전국 철도의 중심으로 기능했지만, 신 서울역사가 설립되며 제 역할을 잃었다. 대신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어 복원 작업을 거친 후,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휴관 중이기 때문이다. 구 서울역사 관계자는 “한국화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4월 1일까지 휴관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그 옛날 가난한 문인들의 쉼터가 되어준 것처럼 ‘문화역 서울 284’의 전시는 무료이며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이곳을 찾는 발길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2. 미츠코시 백화점과 조선은행

 

이상의 <날개>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미츠코시 옥상에서 “날개야 돋아나라”고 외친 무기력한 지식인이 있었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 이상, <날개>

 

그 ‘미츠코시’는 1930년에 개점한 국내 최초의 백화점이다. 이후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효시가 되었다.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과 앞쪽의 대리석 계단이 특징이다. 서울역에서 남대문 쪽으로 걸으면 거리의 한 편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에는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신관이 건축되어 과거의 미츠코시 백화점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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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6층, 신관은 14층인데 외관상 웅장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과거와 달리 주변에 크고 높은 빌딩이 많이 들어와 백화점 건물이 독보적으로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남다른 고고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서 있다.

 

백화점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주말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많지는 않다. 입구도 한산했고, 백화점의 조명만이 거리를 밝혔다. 이상이 올랐던 ‘미츠코시’의 옥상은 지금도 이용 가능하다. 구관과 신관 모두 옥상에 공원을 조성하여, 모더니즘 조형물과 분수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신세계 백화점 입구 맞은편에는 또 하나의 이질적인 건물이 있다. 현대 도시의 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바로 ‘한국은행 화폐 박물관’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은행’으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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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틈엔가 구보는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이제 어디로,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1909년 일제 통감부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한국은행을 건축했고, 1910년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며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일제의 중앙은행으로 기능하여각종 수탈과 핍박이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에 건물의 상단부가 훼손되었는데 이후 복원작업을 거쳐 여전히 깔끔하고 웅장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3. 경성부청

 

 

그는 우선 부청 쪽으로 향하여 걸으며, 아무튼 벗의 얼굴이 보고 싶다 생각하였다.

구보는 거리의 순서로 벗들을 마음속에 헤아려 보았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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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분 정도 걸으면 경성부청이 나온다. 부청 쪽을 향해 걸으며, 구보를 생각한다. 경성부청, 지금의 시청이다.

 

구보는 한길 위에 서서 넓은 마당 건너 대한문을 바라본다. 아동유원지 유동의자에라도 앉아서,

그러나 그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옛 궁전은 여시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여주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시청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얼마 전까지 시청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었는데, 3월이 되어 다시 푸른 잔디밭으로 돌아왔다. 과거의 경성부청 시절에도 청사 앞에 넓은 마당이 있었다. 건너편엔 대한문, 덕수궁의 입구가 보인다. 도시의 상가 건물 옆쪽에 펼쳐진 옛 궁궐은 낯설지만, 빈약한 느낌은 없다. 시간이 흘러 복원 작업을 거치고 관광시설로 두었기 때문이다.

 

원래 조선은행 앞에 있었던 조선은행은 매일신보 앞으로 이전하여 새로 건물을 지었다. 4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로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경성부청이 새로 자리를 잡음에 따라 당시의 서울은 조선총독부-경성부청-서울역-용산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시 축의 거점을 완성했다. 그러나 지금의 경성부청, 즉 서울시청 구 청사의 모습은 쓸쓸하고 소박하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직 당시에 새로운 시청 청사를 건축하기 위해 구 청사를 부분적으로 폭파했기 때문이다. 현재 외벽의 일부만 남아있고, 내부의 구성도 완전히 달라졌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신 청사와는 외관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 청사의 건물 외벽에는 유관순 독립투사를 기념하는 사진과 문구가 크게 걸려있다. 늦은 시간이라 출입은 제한하고 있지만, 여전히 곳곳에 설치된 밝은 조명이 시간이 멈춘 청사를 밝히고 있었다. 
 

 

4. 서대문형무소

 

서대문 형무소는 지리적으로 서울 사대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중심에 위치한다. 과거에는 사대문 안이 실질적인 ‘서울’이었다. 1907년 통감부가 이곳에 교도소를 설치한 것은 사대문을 오가는 조선인들을 철저히 억누르고 탄압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2만여 명의 민족 독립투사들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당대의 문학에도 종종 일제의 탄압을 상징하는 장소로 그려졌고 일부 문인들은 감옥에 잡혀가기도 했다.

 

최주사는 웬일인지 작년 겨울부터 그의 약가방을 이 구둣방에다 맡기고 다녔다. 그 까닭은 아무도 몰랐다.

– 박태원, <낙조>

 

현재에는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있는 독립공원의 일부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조성되어 있다.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왼편에 형무소로 올라가는 산책로가 나온다. 조금 올라가면 거대한 서대문 형무소의 입구와 붉은 벽돌로 쌓은 단단한 외벽과 마주한다. 박태원의 ‘낙조’에 등장하는 최 주사가 매일 걸었던 서대문 형무소의 외벽 길은 일부나마 남아있다. 이 길을 걸으며 그는 당시에 형무소에 수용된 안중근 의사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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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서대문 형무소를 의왕시로 이전하고, 그 터에 역사관을 조성할 때 입구 부분의 외벽만 남겨두어, 측면과 후면에는 울타리가 경계를 구분하고 있다. 내부에는 좌우에 있는 두 개의 감옥동이 있고, 중앙에 있는 고문실은 전시시설로 바뀌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오랜 세월 우리의 역사를 지켜본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얼마 전에 3.1절이 있던 탓인지 폐장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관람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역사관을 방문한 한 여성 관람객은 “내부에 감옥동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특히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일제의 탄압을 받다 돌아가신 조상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서울의 곳곳에는 ‘경성’과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은 백 년 남짓한 세월을 지나왔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거나 새롭게 지어진 빌딩 옆에서 외롭게 ‘버티고’ 서 있다.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일이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각할 여지를 준다는 점만으로도 가치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을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면,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보라. 백 년의 세월을 품은 그것들을 마주할지 모른다.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경성’의 흔적은 과거 무기력한 지식인들을 지켜봤듯이,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