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스포주의)

 

우리 사회는 종종 각종 수치를 증거로 여권의 신장과 평등을 자신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 소외받던 여성들이 사회 전반에 참여하여 능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보다 ‘살만해졌다’는 이유로 여성을 향한 억압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수치와 같은 거창한 사례를 찾지 않아도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여성’이기에 억압당하고 있다. 프랑스의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당연하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 영화 <억압받는 다수>

 

카메라는 한 남자의 일상을 쫓아간다. 남자는 유모차를 끌고 우편물을 확인한다. 꽤 다정하고 평범한 남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자를 둘러싼 일상은 이상하다. 남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는 상의를 탈의한 채 조깅을 하고 유모차를 끄는 남자에게 도움을 줄지 물어본다. 남자에게 예쁘다며 웃고 다니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길거리를 다니는 여자는 반바지를 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휘파람을 분다. 아이를 돌봐주는 남자는 히잡을 썼고 잠깐의 대화조차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한다.

영화 속 세상은 지금 우리의 세상과 같은 모습을 했지만 다르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여자고 여자는 남자다. 우리가 아는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가 완전히 역전된 상태다. 영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보고 희롱하거나 성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이에 반해 남성은 옷 단추 하나 푸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고 성희롱을 당해도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약자로 그려진다. 물리적인 힘도 사회적인 권력도 모두 여성만이 가질 수 있다.


  

ⓒ 영화 <억압받는 다수>

 


영화의 절정은 성폭력을 당한 남자가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작성하는 장면이다. 수치스러워하는 남자 앞에서 여자 경찰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진술서를 읊는다. 시종일관 사무적인 태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남자를 대한다. 피해 남성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옷차림에 대해 칭찬한다. 피해자에 대한 일말의 배려조차 없는 여경찰의 태도 앞에서 피해 남성은 자신의 반바지로 다리를 최대한 가려볼 뿐이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반바지 때문이라는 듯이.



뒤늦게 경찰서를 찾은 남자의 아내도 다를 바 없다. 잠깐 남자를 걱정하고 위로하지만 곧 자신의 회사 생활을 말하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하루 동안 당해온 수모와 아내의 태도에 남자는 이내 울분을 터뜨린다. 더 이상은 가모장제에서 살 수 없노라고. 그런 남자를 향해 여자는 모두 ‘그렇게’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소리친다.


  

ⓒ 영화 <억압받는 다수>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이 느낀 기시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맞물린다. 남자의 아내가 걸어가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루 종일 남자에게 던져졌던 성희롱들이 다시 여자를 향해 날아온다. 11분의 러닝타임 동안 남자가 들었던 말과 당했던 일들 모두 현실에서 여성들이 당하고 있는 억압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주 단순한 역지사지의 논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성별의 전환을 통해 여성들이 당해온 차별과 억압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단지 성별이 바뀌었을 뿐인데 관객들은 더욱 강하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그동안 여성에게 향했던 외모 평가와 희롱의 말들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바지 밑단을 끌어내리던 손, 희롱의 말들을 참아내던 모습, 내내 주눅 들어있던 눈빛. <억압받는 다수>는 위화감 없는 약자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차별에 둔감해진 일상을 소름 돋게 꼬집고 있다. 결코 과장되었다고 할 수 없는 영화 속 현실을 보고도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