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여성들을 위한 ‘판’이 있을까. 영화에는 어떤 여성이 얼마나 등장하고,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당장 포털사이트에 최근 개봉작만 검색해도, 아니 머릿속에 최근에 내가 본 영화들만 떠올려 봐도 답이 나온다. 제대로 된 ‘판’의 부재, 영화의 양성평등 지표로 사용되는 ‘벡델 테스트’가 이를 입증한다.

무엇을 ‘여성 친화적’ 영화라 말하는가

벡델 테스트는 1980년대 중반에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영화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그려지는가에 대해 세 가지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기준을 모두 통과하면 ‘여성 친화적인 영화’로 인정된다. 

1. 대사가 있는 여자 캐릭터가 두 명 이상인가?
2. 영화에서 이 여성들이 단 한 번이라도 서로 대화를 하는가?
3. 남자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주제의 대화를 하는가?

“이 정도도 통과 못 한단 말이야?”라고 반문할 정도로 기준은 단순하다. 80년대의 시각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벡델 테스트가 만들어진 지 30년이 지났다. 이제는 진정으로 ‘여성 친화적’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의 기준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계는 벡델 테스트를 충족하느냐 마느냐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조차 통과하지 못한 영화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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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한국영화 흥행 탑10는 ‘국제시장’, ‘조선명탐정’, ‘강남1970’, ‘오늘의 연애’, ‘쎄시봉’, ‘허삼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기술자들’, ‘살인의뢰’, ‘헬머니’다. 이 중 세 기준 모두에서 합격점을 받은 영화는 얼마나 되는가?

1. 대사가 있는 남자 캐릭터가 두 명 이상인가?
2. 영화에서 이 남성들이 단 한 번이라도 서로 대화를 하는가?
3. 여자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주제의 대화를 하는가?

벡델 테스트를 남자 캐릭터에 관한 것으로 바꾸어보면, 영화판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 머물고 있는지 더 와 닿는다. 거의 모든 영화가 ‘당연하게도’ 둘 이상의 남성이 등장하여 여자가 아닌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영화에 해당한다. 종종 그렇듯, 남성에게는 당연한 것이 여성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된다.

아직 충무로에는 여성을 극의 중심에 두는 시나리오가 부족하고, 주체적인 여성영화를 만드는 영화제작자가 부족하고, 이를 지원하는 투자자가 부족하다. (관련 기사 : ‘여성감독 전성시대를 꿈꾸며) 한쪽의 부족은 왜곡으로 이어진다. 진짜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영화를 대신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세상에서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들이다.     

충무로 여배우에게 연기력보다 중요한 건

‘판’이 없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가 좁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여배우의 낮은 입지로 이어진다. 지난달, 한국갤럽이 발표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배우’ 설문조사(남성 846명, 여성 854명 대상) 결과에 따르면 10위권에 든 여배우는 전지현, 단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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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갤럽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 즉 여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역할 범주에는 제한이 있다. ‘젊고 예쁜’ 여배우들은 로맨스물의 ‘젊고 예쁜’ 여주가 되거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로 대중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그들에게 주어지는 시나리오와 역할은 줄어든다. 탑 여배우조차 30대 중후반을 넘어가면 떼주연물 중 한 명이 되거나, 남성을 서포트하는 조연의 역할을 맡는다. 4~50대 남배우들이 원톱 혹은 (남성)투톱 영화에 출연해 충무로를 주름잡는 것과 대비된다. 남배우는 나이가 들면 더 빛을 발하지만, 여배우는 나이가 들면 빛이 바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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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배우’ 스틸컷

지난해 개봉한 문소리 감독의 단편영화 ‘여배우‘는 나이 먹은 여배우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젊고 예쁜 후배에게 밀려 배역을 까인 그녀는 “연기력이랑 매력이 붙어봐. 맨날 매력이 이긴다니까”라며, 여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매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매력이란 ‘젊음’이 반, 혹은 그 이상을 먹고 들어간다. 유독 여배우에게만 ‘어리고 예쁜’이 요구되는 것은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에 의해서다. 어차피 연기력은 극의 중심인 남배우가 담당하는 것이고, 서포트하는 여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연기력보다는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줄 아름다운 외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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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하는 여배우 소리에게 친구는 “주눅 들지 말고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 되라”고 소리친다. 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 인정받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메릴 스트립처럼 맘마미아 같은 작품도 하고, 연기력을 마음껏 뽐내라고 말이다. 그러나 충무로에서 여배우의 외모가 아닌 연기력을 돋보이게 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소리는 조연급의 아줌마 역할조차 시나리오를 기다리는 처지다. 지금의 충무로에서 한국의 메릴 스트립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