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20대다. 누군가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청년 논객이라는 이름이 붙어본 적도 없고 크게 유명해져 본 적도 없지만 여러 웹진부터 패션 잡지, 공중파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일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큰돈을 벌고 있는 건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계약서 한 장 안 쓴 계약도 있고 돈을 받지 않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5년 차가 된 지금에서야 대학원 연구소에서 일하는 것까지 합쳐 석사과정 학비 겨우 모아 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상황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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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동구 마두동 자택에서 편안한 복장으로 찍었다고 한다. 디자인 관련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 80만원을 번다는데 부럽다

ⓒ 조선닷컴

 

#노마드

노마드. 한국어로는 유목민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이라 함은 휴대가 가능한 전자기기를 통해 자유롭게 이동하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한 글에 따르면 노마드는 ‘제한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사람이다. 그 말은 즉, 유목민은 정체하는 공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비틀면, 나는 유행이나 흐름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로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 내 수입과 형편으로는 집을 살 수 없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는 자가라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것 같다. 반전세도 힘들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나마 모자라진 않을 정도의 경제적 환경에서 자라 수도권 근방에 부모님의 집이 있다는 점이다(요즘은 다 그렇겠지만 용돈은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카페든 광장이든 혹은 다른 이의 사무실이든 내가 짐을 풀고 내 공간처럼 쓸 수 있는 곳은 어떻게든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왜 그렇게 사느냐’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내가 돈을 쓰는 방식을 두고도 지적하기에 이른다. 뒤에서 또 얘기하겠지만, 기존에 존재하는 삶의 양식과 다르다고 해서 혹자는 나를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면서 엄한 데 돈 쓰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들과 내가 사는 방식이 다르다고 하여 누군가가 더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달관 세대가 사는 법’이라고 선보인 기사는 ‘그렇게 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쟤네 어떡해, 저렇게 산대’ 혹은 ‘쟤넨 저 정도로 만족한대’로 들린다. (기사1) (기사2) (기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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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찬 씨의 어느 주말 정리 그래픽

기사 보니 칼퇴라는 게 있던데 그런 게 있다니 신기하다. 일단 주말이라는 게 존재한다니 부럽다 ⓒ 조선닷컴

 

#경계

스스로 노마드라고 했지만, 그만큼 나는 정치적으로도 노마드에 해당한다. 중앙정부가 행하는 정치에서든, 사적 영역에서의 정치에서든 마찬가지다. 나는 어느 한 곳에 소속을 두고 있지 않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 단계에 애정 및 소속의 욕구가 있다고 했는데, 나라고 그런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어딘가에 소속을 두는 것에 실패했다.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고 조금은 아쉬운 소리 듣는 학점으로 졸업했지만, 결과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서 얻은 건 실패뿐이었다. 물론 글을 쓰는 것도 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긴 시간 기다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구체적인 성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이 일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가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었다는 건 정말 운이 좋았다는 뜻이다. 운이 좋다고 해서 수익이 높았다는 건 아니다. 글을 쓴 지 3년째가 되었을 때도 한 달 수입이 0원일 때가 있었다.

 

최근 나 같은 사람을 부르는 단어가 생겼다. ‘창의적 하위계급’이다. 이는 학계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예술가를 묘사한 단어 중 하나다. 어떤 학자가 말하길, 창의적인 힘은 결국 경제적 능력과 연결된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창의적이라는 것 역시 사회 내에서는 자본의 힘을 얻는 곳, 그리고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곳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이렇게 창의적 엘리트와 창의적 하위계급 간의 양극화 현상 속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쪽을 이야기하기에 창의적 하위계급은 적절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을 통해 여러 대안 공간과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들, 현실적으로 자립과 생존을 도모하고 새로운 형태로서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 마이너 하다고 불리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선보이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나에게만, 혹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테사 모리스-스즈키라는 학자는 ‘비가시적 정치’라는 소재로 이야기하며 21세기 이후 한국, 일본, 대만 등의 아시아 국가에서 정부적 정치로부터 비정부적 정치로의 이동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토리 세대’를 바라보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데, 이러한 비정부적 정치는 자가 생존적 성격이 강하며 일상적인 사회적 경계의 외부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헐거운 개념처럼 보이지만, 이를 체감하고 사는 이에게는 자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좋은 개념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내 세계’라는 개념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는데, 이는 내가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영역이 절대다수가 가진 사회적 영역의 밖에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기 때문에 생각한 것이다. 비정부적 정치가 존재하는 작은 세계라는 건 외부에 크게 닿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정부적 정치의 개입에 인한 균열이 없다면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도 있다. 이는 충분히 가능해진 일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외부와의 연대를 더욱 신경 써야 한다. 그래도 나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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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달관 세대’ 검색 결과 중 일부. 조선일보가 기사를 낸 이후 많은 반박기사가 나왔다

 

#삶

우리는 삶의 방식에 관한 상상력을 확장하되, 사회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최저임금도 올라야 하고, 최소한 내가 무언가를 조금 더디게 하거나 실패하더라도 금방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이 당연한 전제를 무시하고, 수많은 사람은 지금의 상황이 정상이라고 착각하며 오히려 사회 안전망을 걷어내면서 ‘꿈을 꾸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절박해야 성공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절박하면 절박한 만큼 살아남기 어렵고, 그래서 생존에 집중하며 발버둥 쳐야 한다. 

 

자기계발서와 강연은 내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이 성공했다고 해서 남도 성공할 수 있는 줄 안다. 비단 창의적 하위계급이 아니더라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개인은 ‘버티는 삶’ 수준이 아니라 ‘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넓은 시각으로 삶의 방향을 만들어간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풍족해지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덜할지언정 경제적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나’를 만들고 세워나가는 것조차 힘든 지금 꿈이라는 건 딴 나라 얘기다. 우리는 소진당하고, 또 소진한다. 성공이든 성장이든 꿈이든,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생존

기성세대의 논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달관 세대가 사는 법] 승진보다 저녁 있는 삶… 일 적은 부서로 갈래요’라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연세대 경영학과 정동일 교수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연봉, 승진 이외에 다른 동기 부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봉 인센티브, 승진 기회 등을 주며 최대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벗어나 고민해야 하는 것은 기업 문화와 노동 문화, 사회적 구조다. 어쩌면 ‘회사’라는 개념 자체가 좀 더 유연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내가 달관했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진 와중에 내가, 혹은 개개인이 달관하든가 말든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달관은 감정이고, 삶의 방식은 개인이 주어진 여건 내에서 하게 되는 합리적 선택이다.

 

기성 언론이나 학자들을 포함한 몇 시각에서는 지금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상에 있어 저항을 종용하거나 반 자본 논리를 끌어오는데, 그런 건 그냥 그 말을 꺼낸 사람들이 해줬으면 좋겠다. 저항의 종용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이야기고, 자본 대 반 자본의 담론 역시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할 가능성이 커서 위험하기도 할뿐더러 결국 오해의 여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특히나 이 이야기를 ‘담론’으로서 논의하는(혹은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구조주의와 같은 근본적인 시각을 초점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실제 이러한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에는 답답해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성세대는 ‘왜 너희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다. 혹은 ‘도망간다’, ‘포기한다’는 식으로 표현할 때도 있다. 어쩌면 저항하라는 말에서 오는 피로도가 커서 ‘저항하라는 말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지금의 자가 생존적인 활동을 선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각박한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살아남는’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과 과정을 고민한다. 그러한 고민이 값진 결과를 낳을지 그 여부를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말이다.

 

이러한 논의의 간극은 다원적 실천만큼의 다원적 관심, 그리고 어느 쪽이든 현상을 심도 있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 간극을 줄이려면, 우선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말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성공도 성장도 바라지 않으며 그저 소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기도나 위로가 아닌 처우 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