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사립대학 기성회비가 수업료 명목으로 통합된 이후 16년 만에 국·공립대학에서도 기성회비가 사라졌다. 지난 3월 3월 국회에서 통과 된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하 국립대학 회계 법안)’ 때문이다. 이 법의 통과로 국·공립대학에서 이전까지 학생들로부터 기성회비 명목으로 걷어왔던 돈을 수업료 명목으로 계속해서 걷을 수 있게 되었다. 50년 가까이 법적 근거가 없었던 돈에 대한 근거가 만들어지면서 이젠 합법적으로 같은 양의 돈을 걷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잘못 끼워진 고등교육의 첫 단추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전문 인력 수요를 해결하고 폭발하는 국민들의 교육열 해결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 불안과 계속된 경제난으로 교육 당국의 재정지원이 빈약했고, 국·공립 대학들에 대한 지원도 열악한 편이었다.

 

당시 대학설립의 인가권을 쥐고 있었던 미군정에서는 사립대학 유치를 통해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자 했다. 당시에도 사립대학들은 학교운영에 필요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에 필요한 비용 대부분을 국가가 아닌 학부모에게 전가하는 ‘수익자 부담 원칙’은 공식화되었다. 나라의 재원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공공재에 있어 ‘수익자 부담 원칙’이라는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군부도 막지 않았던 등록금 상승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혼란의 시기 동안 대학에서는 국가의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는 사립대학뿐만 아니라 국립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교육에 대한 자유방임적 정책과 부실한 사학 문제 척결을 이유로 강력한 통제 정책이 시행되었다.

 

1961년 ‘학교정비기준령’, 1965년 ‘대학생정원령’을 제정해 대학 정원 결정 및 대학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가 결정하도록 하였다. 대학의 등록금 액수를 정부가 정하는 ‘등록금 한도제’를 실시하여 대학들이 정부의 동의 없이 등록금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대학이 이를 어기고 정부가 정한 한도를 넘어 등록금을 걷으면, 등록금을 강제로 반환조치 시켰다.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강력한 대학 통제 정책은 대학 재정의 대부분을 학생등록금에 의존하고 있던 사립대학들이 극심한 재정난을 겪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후 정부에서 ‘등록금 한도제’를 폐지하고(1966년), ‘기성회비 한도액’까지 폐지(1969년)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립대학의 등록금이 폭발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의 매년 등록금 인상률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2배를 초과했고, 1966년 이후 12년 동안 사립대 등록금은 연평균 29%씩 올랐다. 한 해에 40%까지 오른 적도 있었다. 급속도로 오른 등록금으로 인한 학생들의 부담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로 인해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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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별 등록금 과련 정책들 Ⓒ참여연대

 

이후 정부에서는 등록금 인상이 물가를 더욱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1978년부터 1980년도까지 저등록금 정책을 펼쳤다. 등록금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지 않았을 뿐, 등록금 액수를 줄이는 정책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대학교육 정책은 이전 정권의 자유방임적 정책과는 달리 정부주도하의 엄격한 통제와 지원·육성정책이 병행되었다. 하지만 대학 등록금 정책은 이와는 반대로 1977년까지는 소비자 물가상승률 보다 대학 등록금 상승률이 더 높았다.

 

전두환 정권 때에도 등록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1980년 정부가 발표한 7·30교육개혁안에 담긴 ‘졸업정원제’ 때문이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에서 신입생 선발 시 졸업 정원의 30%(전문대학의 경우 15%)를 더 모집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정부에서는 ‘졸업정원제’ 실시로 학생정원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교육시설의 확충과 현대화, 충분한 교수의 확보 및 처우개선 등을 이유로 사립대학의 등록금 인상률 상한선을 폐지했다.

 

하지만 교육여건이나 질적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사립대학들이 일류대학 등록금 수준과 동일한 수준으로 등록금을 책정하기 시작했고 전국에 있는 학생들은 다시 등록금 부담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 또한 대학 등록금을 올리는 데 이바지 한 바가 컸다. 이전 정부까지 대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했다면, 노태우 정부 들어 ‘대학 자율화 조치’가 추진되면서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대학 자율화 조치’는 6.29선언 이후 논의된 각종 교육자율화방안을 광범위하게 수렴한 것으로, 핵심은 정치로부터 교육의 독립이었다.

 

그중 ‘등록금 자율화 조치’는 1988년도까지 문교부 장관의 권한으로 결정되던 등록금을, 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행 초기에는 등록금의 인상률과 책정 과정이 학생 운동의 표적이 되어 크게 올리지 못했지만, 1990년도 이후로 등록금은 60년대에 ‘등록금 한도제’가 풀릴 때와 마찬가지로 등록금 인상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폭발적인 상승세는 IMF 이전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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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29일자 한겨레

 

국립대 역시 등록금 자율화 정책으로 기성회비 책정의 자율권을 얻어 등록금을 올렸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교육여건 개선 계획 가운데 ‘국립대 자율화 방안’의 하나로 국립대 등록금을 학교 자율적으로 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국립대에서도 기성회비와 수업료, 입학금 책정이 모두 자유로워진 것이다. 2002년 이후 국립대의 등록금 인상률은 사립대보다도 높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학종합평가인정제’, ‘BK21’ 등과 같은 각종 평가 제도를 시행해 교육 분야에서 자율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하여 차등적으로 국고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학에서 소요되는 예산은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이 자체적으로 부담하도록 했고, 대학 당국은 등록금 인상을 통해 국가로부터 받지 못한 재원을 채우려 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는 연간 등록금이 1,000만 원인 대학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에서도 대학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전까지 일괄적으로 진행하던 일반지원사업을 폐지하고, 대학재정 지원 사업을 특수목적 지원 사업으로 전면 전환했다. 평가와 경쟁체제가 더욱 확대되었고, 정부의 재정 지원사업에서 선발되지 못한 대학들은 등록금 인상으로 재정을 확충했다.

 

참여 정부에서도 계속해서 상승하는 등록금에 대한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소득층의 고등교육 기회 확대와 학비 부담 경감을 위한 정부중심의 학자금 대출이 대폭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반값 등록금’과 관련된 이슈로 인해 이전 정부 보다는 상대적으로 등록금 인상률이 낮았다. 하지만 정부의 미온한 등록금 정책과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국민들의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갔다. 결국, 이명박 정부에서는 2011년 9월 ‘국가장학금 제도’를 발표하고 소득 3분위 이하 학생에게 정해 진 장학금을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I유형과 대학의 등록금 인하 동결, 장학금 추가확충 등 대학 자체의 노력과 연계하여 지원하는 II유형으로 나뉘어 2012년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국가장학금으로 편성된 예산이 3000억 원밖에 되지 않았고, 대학생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받을 수 있기 보단 기초생활수급자장학금, 차상위계층장학금, 저소득층성적우수장학금 등 빈곤 계층을 대상으로 정책이 시행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서 시행하던 ‘국가장학금 제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기보다 국가장학금 예산은 늘어났지만, 아직 ‘반값 등록금 공약’을 완성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대학교육연구소 정부가 반값등록금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은 총 7조 원이다. 하지만 국가장학금, 근로장학금, 희망사다리장학금 등을 합쳐도 총 3조 9천억 원 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다. 대학교육연구소는 “정부가 예산을 전액 부담하지 않고, 상당 부분을 대학에 떠넘기면서 ‘반값등록금’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하여 정부의 ‘반값 등록금 완성’ 주장을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