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00 씨*는 세월호 사건 이후 강박처럼 더 큰 재난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전이었다면 잊고 넘어갔을 친구의 가벼운 사고소식에서도 공포를 느끼고, 혼자 있을 때면 가족이 떠나는 상황에 대해서 상상하곤 했다고 되뇌었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체계가 붕괴되면서 완벽에 대한 불신도 생기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집단 체험은 그가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약간씩 바꾸게 만들었다. 이전에 주변 선배들에게 이야기 들었던 용산 참사, 광우병 파동에 대해서 입장을 내리는 것이 온전한 내 생각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로 생각을 밝히는 것이 수월해졌다고 고백했다.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다가 네이버에서 들어갔는데 속보로 해상사고가 났고, 다 구조되었다고 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점심을 먹으러 친구 다섯 명과 함께 김치찌개 음식점에 갔다. 음식점 TV에서는 오보였다고 나오고 있었다. 놀라서 밥 먹다말고 친구랑 울었다. 대학에 입학한 첫 해였고, 수요일이었다.

 

이후 수업에서는 그 이야기 밖에 안 했다. ‘안타깝다, 슬프다’하는데 서로 슬픔을 공유하진 않았다. 그냥 똑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저 친구들과 슬픔을 공유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은 없었다. 큰 변화는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서 엄마랑 통화했다. 엄마가 울었다. 자취를 하니까 엄마가 내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같이 울면서 엄마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 애틋해졌다. 이후로 혼자 있으면 세월호 생각을 계속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몇 명 구조되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렇게 일상을 시작했다. 혼자만 있으면 그 생각이 나서, 엄마랑 통화도 자주 했다.

 

참사 이후 강박에 시달렸다. 내가 까먹고 있는 것이 있는지 계속 되짚게 되었다. 소중한 건데 잊고 있던 것이 있었는지. 가족한테 전화도 자주 안 드렸었는데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통화도 자주 한다. 엄마, 아빠, 가족이랑 애틋해졌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엄마, 아빠가 떠나게 되면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친구가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제로 많이 다치진 않았다는데도 걱정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 안전에 대해서 민감해진 것 같다. 

 

2 

2014년 5월 24일 서울 ⓒ이찬희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고등학교 때에는 낯을 가리긴 했어도 지금만큼 어둡지 않았다. 지금은 비관적으로 변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기도 했고 피디나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걱정도 없었다. 막연히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공부도 안하면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자시간에 원피스 보고, 책 읽고 그랬는데도 불안하지 않았다. 감시가 심한 학교라 건강도 나빠지고 감시도 싫어서 자퇴도 생각했었다. 그랬던 고등학교 생각이 많이 나더라. 세월호 희생자 중에 박예슬이라는 그림 그리는 친구 이야기를 보며 엄청 울었다. 그런 사연들 하나하나가 슬펐다. 자연스럽게 내 고등학교 때와 비교가 되었다. 그 친구는 자기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게 마음 아팠다. 나보다 훨씬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인데 빚을 진 느낌이 들었다. 

 

‘5·18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플랭카드를 본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의 아픔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 년이 지났는데 놀랍도록 변한 것이 없다. 4·16 백일 되던 날,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와 문화제에 갔다. 비가 엄청 오던 날이었는데 그 때도 비슷한 말을 친구와 나눴었다. 그때는 ‘백일이나 지났는데 바뀐 게 없구나’였다.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이제 그만 잊자’는 것도 재난이 하나의 사건, 스캔들처럼 소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당시에 애도하고 슬퍼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많이 슬퍼했으니 잊자’ 하고 있다.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렇다.

 

3

2014년 5월 9일 서울청운동사무소 ⓒ김흥구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거리가 먼 이야기일 수 있는데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전에 ‘국제시장’ 예고편을 봤는데 지금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라고 말하는 느낌이라 불쾌했다. 지금도 문제가 분명 많은데도 덮어놓고 지금은 좋다고 하는 것 같아 거슬렸다. ‘위플레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드럼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친구들은 열정이 멋지다, 자극 받았다 했는데 나는 내가 노력한다고 달라질 세상인지 의문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불신, 염증이 확고해졌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 대한 반발심은 개인 차원, 나를 찌르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이때에는 학교구조, 시스템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단순히 나에게 뭐라고 하니까 반발하는 거였다. 지금은 구조를 의심한다. 사회과학 동아리를 하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사회와 관련된 무언가를 직접 경험을 하니까 시각이 생겼다. 이전에는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용산 참사, 광우병 촛불집회 같은 이야기들에 대해 ‘내 생각’이랄 것이 없었다. 선배들을 통해서나 인터넷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였다. 세월호 이후에는 내 생각이라는 것이 생긴 것 같다.

 

 

*[뭍위에서] 기획에서 인터뷰이의 이름은 인터뷰이의 의향에 따라 실명 혹은 익명으로 기록했습니다.

**인터뷰는 2015년 4월 14일에 진행됐습니다. 

인터뷰.글/ 농구선수(lovedarktem@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