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관음기] 4화 그 무엇도 아닌 사소한 자존, K의 낙서장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 아닌 유행을 타기 시작한 후로 나의 자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나더러 ‘자존감 폭주 기관차’라 불렀다. 나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작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시선의 사슬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 모를 술자리에서 몇몇 이들이 라캉이니 들뢰즈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멀뚱대기만 할 뿐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라캉도 들뢰즈도 얼핏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때 그 자리에서 자괴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라캉을, 들뢰즈를 알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멋쩍음이라든가 주저로움 같은 것이었겠지.

 

나는 그때의 경험을 K에게 소상히 털어놓았다. 이러저러해서 그 대화에 끼지 못했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책했다는 것을. 그때 K는 해맑은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어. 그럴 때는 그냥 이렇게 말해. ‘야, 너 진짜 말 못한다.’ 라캉이나 들뢰즈를 빌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진짜 말 잘하는 사람 아니겠니.” 그때 K의 얼굴에서 나는 자존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카페에서 다시 K를 만났다.

 

 

 

k-전면부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봐도 되는 건가?

자의식이 팽창한 상태에서 쓴 다이어리이긴 하지만 딱히 보면 안 되는 페이지는 없다. 다만 당신에 대한 욕이 쓰인 페이지를 발견하게 되더라도 못 본 척 넘어가 주었으면 한다.

 

알겠다. 나도 똑같은 다이어리를 산 적이 있다. 언제 어디서 산 것인가?

작년 12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샀다. 고등학교 때부터 매년 다이어리를 써왔다. 작년에는 휴학해서 계획할 것이 없었던지라 먼슬리만 있는 다이어리를 샀었다. 올해는 복학도 했고 자의식을 털어낼 공간도 필요해져서 큼직큼직한 다이어리를 골랐다.

 

다이어리를 매일 쓰는가? 또 용도는 무엇인가?

예전에는 매일 썼는데 요즘은 이틀에 한 번꼴로 쓰고 있다. 그나마 처음으로 꾸준히 쓰는 다이어리다. 얼마 못 가 내팽개친 다이어리가 이전에 몇 있었다. 꾸준히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폰보다 다이어리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항상 들고 다녔고 꾸미는 것에 대한 강박도 사라진 상태였다.

 

먼슬리는 보통 과제, 약속과 같이 일정 정리를 할 때 쓴다. 생리 주기나 기억해야 할 정보도 쓰고. 위클리는 감정을 참을 수 없을 때 휘갈기듯 쓰는 편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라든가,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오는 날이라든가, 돈을 너무 많이 써서 걱정되는 날이라든가.

 

 

부정적인 정서가 주를 이루나?

딱히 부정적이라고 하긴 어렵다. 주된 것은 ‘자의식 폭발’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자의식은 간단히 말하자면 나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거리를 두지 않고, 그저 나인 채로 쏟아내는 것? 처음 취재 요청을 받았을 때도 자의식이 너무 많이 드러난 다이어리라 부끄럽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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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체가 매우 자유롭고 여러 가지 펜을 쓴다. 괘념치 않는가?

다이어리는 정말 오로지 쓰기 위해 쓴다. 예전에 예쁘게 꾸며보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딱 3일 후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밀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틀리면 마음 아파하고 그랬었는데. 되고 싶은 이미지와 실제의 나를 구분하려고 한다. 음, 다시 말해 내가 수행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변화의 계기는 그저 나의 무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되는대로 살아야지, 되는대로 써야지 싶었다. 펜도 책상에 굴러다니는 것 아무거나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것으로 쓴다. 왜 다이어리를 ‘꾸며야’ 할까? 나만 보는 것인데. 그때그때 생각을 담아내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끔 글씨를 막 써서 나조차도 못 알아볼 때가 있는 점은 좀 문제인 것 같다.

 

먼슬리를 보니 사람을 자주 만나는 것 같다.

과제 한다고 해놓고 사람 만나고 놀고 그런다. 그래도 요즘은 자제해서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많아 보이는가? 학생회 하던 시절에 비하면 줄어든 편이다. 지난겨울에 교정 수술을 받았는데 꽤 오랜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고 덕분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때 사람 만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사실 많이 만나는 것 같아도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만 말이다.

 

 

 

k-먼슬리-확대-정동진

 

 

중간고사가 끝나고 정동진에 다녀온 모양이로군. 왜 파란색으로 휘갈겼나?

나름의 ‘꾸밈’이다. 바다를 표현해보았다. 위에는 기차도 그렸다. 위클리에도 종종 보이지만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한다. 가끔 친구들에게 그려달라고 하기도 한다. (주섬주섬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펼쳐가며) 이건 버드나무고, 이건 수업 시간에 졸면서 그린 것 같다. 이건 어느 날 웹툰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그렸는데 망한 것이다. 또… 이건 왜 그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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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려준다고?

많은 사람을 공동 필자로 초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요청한다. 메모장과 다를 바 없다. 특히 이 그림을 아낀다. 동생의 턱과 볼의 경계가 사라져서 얼굴이 모더니즘 양식이라 놀리고 있을 때였다. 동생이 화가 나 툴툴대며 그려주었다. 동생의 표정과 나의 표정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너무 잘 그렸다. 내 얼굴은 삼각형인데 그 이유는 브이라인이기 때문이다.

 

위클리 맨 앞장에는 무엇을 쓴 것인가?

한 주의 목표다. 나도 몰랐는데 써 놓은 것을 보니 몸에 대해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몸살 걸리지 않기’ ‘이제 운동도 하기’ ‘잘 먹고 잘 싸기’ ‘일찍 일어나기’ ‘이제 게으름 부리지 않기’. 어떤 주에는 ‘음…’이라고만 써 두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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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에 알 수 없는, 특이한 문장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119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타자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 눈이 아픈 건 양파 때문이었어’라니?

구급차가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고를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위 말하는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날이었다. 또 언젠가 집에만 가면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도대체 왜 그런지 종잡지 못한 채로 일주일 동안 눈물을 흘렸다. 범인은 아버지가 걸어둔 양파였다. 감기 걸리지 말라고 침대 머리맡에 양파를 줄줄이 이어 걸어 놓으신 것이다. 발견했을 당시 양파에는 싹도 나 있었다.

 

사실 그냥 심심하면 꺼내 쓴다. 별 얘기 아니다. 그래도 사소한 일이라도 까먹지 않으려고 써두는 편이다. 사소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함께 한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적어두면 그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사소한 것의 힘이랄까. 같은 이유로 티켓 같은 것도 붙여둔다. 직감적으로 그때를 느낄 수 있으니까.

 

이상하게 성찰적인 사람 같다. 꿈 이야기도 많이 보이는데?

무슨 꿈을 꿨는지 쓰는 편이다. 꿈을 많이 꾸는 편이기도 하고, 이상한 꿈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정서가 불안하면 꼭 쫓기는 꿈을 꾼다. 일일이 다 나열하는 것은 아니고, “계단 올라가며 도망가는 꿈” “같이 수업을 듣는, 이름 모를 사람과 애무한 꿈” 이런 식으로만 쓴다.

 

왜 꿈이 무의식을 표출한다지 않는가. 억눌러놓은 나의 무의식, 내면에 대한 힌트라 생각해 쓴다. 작년에는 따로 꿈의 내용을 쓰기 위한 수첩을 들고 다닌 적도 있다. 사실 꿈뿐만 아니라 별의별 것들을 모두 적어 놓는 편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말도 안 되게 쓰는 것이 좋다.

 

프리노트는 어떻게 쓰는가?

원래는 티켓을 몽땅 뒤로 몰아 붙여 감상평을 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금세 잊었다. 일기를 길게 쓰고 싶은 날 쓰기도 하고, 과제 하면서 브레인스토밍할 때도 쓰고, 티켓도 붙이고, 노트를 가져오지 않은 날에 쓰기도 하고.

 

어느 날 문득 궁금증이 든 문장을 써놓고 그걸 잊을 때가 있다. 그리고 ‘어, 이걸 언제 썼지?’하며 발견하고, 스스로 자기 논파를 하기도 한다. 예컨대 어느 날 ‘A는 B야’라고 쓰인 문장을 발견한 후, ‘아니야! A는 B가 아니야’ 이런 식으로 덧붙여가며,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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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논파를 발견했다. ‘자이(Xi)’에 대한 논박이 인상적인데, 현재의 입장은 어떠한가?

아, 살면 좋긴 하지만, 그리고 동시에 너무 갖고 싶지만 그렇다고 끊임없이 부러워하며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본주의적 욕망을 인정하되 결핍된 존재로 스스로를 정체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종종 본인의 다이어리를 다시 보는가?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보니 어떤지도 궁금하다.

이상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해두어서 잘 안 본다. 날것의 자의식이 부끄럽다. 한 5년, 10년이 지난 후에 다이어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나로부터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와 반년 전의 나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고 너무 비슷한 상황이라 괴롭기만 하다.

 

또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보니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이 꽤 많아 놀랐다. ‘K, 앞으로 무엇무엇 하자’ 이런 식? 나 스스로 말을 거는 것이 많다. 나를 다잡기 위해서도 다이어리를 써왔구나 싶다.

 

다이어리에 K가 잘 묻어난다. 마지막 장에는 소중한 것이니 꼭 돌려달라는 간곡한 메시지가 적혀있는데.

남들이 보면 낙서장이지만,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쪽지 시험을 볼 때 친구에게 뒷장을 뜯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마음이 너무 아플 정도였다. 종이 한 장일 뿐인데 왜 이렇게 집착을 하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의 집합이지만 잃어버리면 1년의 기억 중 많은 부분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꼭 돌려달라는 메시지는, (특히 나를 아는) 다른 누군가가 절대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혹시 사고로 죽으면 유품을 정리할 때 누군가가 볼 수 있으니 절대 사고로 죽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할 정도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솔직하게 썼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욕망까지도 가감 없이 써내려갔다. 보통 다이어리를 쓰면서도 누군가가 볼 수도 있다는, 약간의 의식들을 하며 쓰지 않나. 그런 얇디얇은 자기검열까지도 모두 걷어내고 쓰려고 노력했다. 솔직하게 털어내는 것,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존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자존에서 끝이 났다. 나도 K와 똑같은 다이어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빈칸으로 남은 나의 다이어리에 나는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인터뷰/글. 이매진(temporis@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