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는 ##화재에서 고객 상담과 문의 업무를 맡고 있는 2년차 직장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여러 명의 새엄마, 기댈 곳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끈이었던 할머니의 죽음을 경험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그에게 어중간한 위로가 주는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제 3자가 건네는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상처와 원망하는 마음을 줄 뿐이었다. 그는 세월호 사건에서 제 3자인 자신의 추모와 위로가 유가족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 날은 평소와 같았다. 아침부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부랴부랴 출근하느라 바빴다. 지하철에서 한 숨 돌리며 핸드폰으로 확인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 것을. 그 때까지만 해도 전원 구출되었다는 소식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쁘게 이런 저런 상담과 민원 업무에 시달리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세월호 사건 소식을 접했다.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아침까지는 전원 구출이었는데 실종자와 사망자 숫자가 0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오보’라는 글자가 거짓인 줄 알았다. 회사 동료들과도 계속 세월호 이야기뿐이었다. 

다들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자꾸 말이 바뀌니까. 
퇴근 후는 평소와 달랐다. 원래 뉴스를 보는 편은 아닌데 퇴근 후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텔레비전을 켜서 뉴스를 보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핸드폰으로 다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뉴스나 신문을 보지 않는데, ‘오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뉴스를 봤다. 화면을 가득 채운 오보라는 말과 영상들을 믿을 수 없었다. 밥을 먹고 씻는 중에도 뉴스를 계속 틀어 놨다. 점점 오보라는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발생한 오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현실감을 떨어뜨렸다. 잠에 들려고 누웠는데 걱정과 불안으로 잠이 오지 않았고 그 때서야 세월호 사건이 ‘진짜’로 느껴졌다. 

2014년 11월 3일 진도체육관 ⓒ한금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불안과 걱정으로 잠 못 이룬 다음 날,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눈을 떠도 사건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무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업무를 보느라 바빴지만 중간 중간 혹시나 누군가 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계속 확인했다. 그럴수록 절망감은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변화가 없으니 답답했다. 도대체 수많은 담당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언론에서 떠드는 여러 가지 가설과 가능성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한명이라도 더 살았으면 했다. 직접 당한 사고는 아니었지만 마치 세월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세월호 사건은 성인이 된 이후 가장 큰 참사이지 않았나 싶다. 성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생각이 더 커진 시점이라는 말이다. 어렸을 때도 참사라 불릴만한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그 때의 나는 나 이외의 더 큰 무언가를 보기에는 많이 어린나이였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건에 의해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이후 처음 목격한 참사였다. 

2014년 12월 25일 안산합동분향소 ⓒ박김형준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있어서는 안 될 오보,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점,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월호는 그 자체가 참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1년이 지난 지금도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세월호만 생각하면 억울하고 답답하다. 오죽하면 시간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 수 없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슬프고 답답하다. 1주기가 되면서 다시 세월호에 관한 여러 가지 뉴스들이 나왔다.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서 제발 좀 사건에 관한 진실을 알려달라고 호소하는 유가족들을 보면 다시 1년 전의 잠 못 이루던 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항상 재난과 사고를 이야기하고 최악을 생각하는 직장에서 근무다하다 보니 무뎌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세월호 사건은 모두에게 괴로운 기억인 것 같다. 1년 사이 슬픔과 죄책감은 더 심해졌다. 분노할 줄을 알지만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으로 아파하면 뭐하나. 밥 먹고 잘 거 자고 친구들 만날 거 만나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진다. 나의 어설픈 감정이입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1년 전에도, 지금도 추모 현장에 갈까 여러 번 마음을 먹었지만 갈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내 일상들로 바쁘고, 바쁜 것보다 더한 죄책감 때문에 가질 못했다. 밥 먹고, 웃고, 떠들던 내가 갑자기 추모 현장에서 우는 장면을 상상하면 나 스스로 위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 아파하는 내 감정이 거짓은 아니지만 과연 그곳에 갈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전히 용기가 안 난다. 

2014년 77일 안산단원고 이소진 학생의 방 ⓒ강윤중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어린 시절 내가 받았던 위로들이 떠오른다. 말뿐인 위로들은 오히려 상처가 됐었다. 내가 느꼈던 원망하는 마음과 상처를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전달하는 꼴이 될까봐 무섭다. 물론 말뿐이라고 느꼈던 위로들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처럼 세월호 사건에 대해 내가 느끼는 슬픔과 죄책감도 진심이다. 하지만 나는 세월호 사건에 있어서 제 3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제 3자인 내가 건네는 섣부론 추모와 위로가 이미 세월호 사건 자체만으로도 상처 받은 유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와 괴로움을 줄까봐 두렵다. 
*[뭍위에서] 기획에서 인터뷰이의 이름은 인터뷰이의 의향에 따라 실명 혹은 익명으로 기록했다.
**인터뷰는 2015년 5월 1일 진행됐다.
인터뷰.글/ 백야(yjeun020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