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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위에서] ⑫ “슬픔보다 무기력함을 강하게 느꼈다”

유OO씨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시기, 휴학상태로 대학 내 자치언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있는 분당이 아닌 학교와 가까운 서울시 성북구에서 지냈다. 그는 사고 이후 엘리베이터에서 손잡이를 꼭 잡는다거나 공사장 같은 곳을 지나가지 않으려는 행동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그가 만든 가장 큰 원칙은 ‘슬픔으로 무언가를 지워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서울 성북구에서 지내고 있었다. 16일에 여객선이 침몰했을 때 (분당에서) 엄마가 왔었다. 엄마가 먼저 얘기를 꺼냈고, 나는 소식을 확인했다. 그때 엄마에게 걱정할만할 일이 아니라고, “얘네 다 구출됐대”라고 말했다. 첫 번째 오보가 났던 때다. 엄마와 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뉴스를 확인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TV가 없어서 속보는 대부분 트위터로 접했다. 그 외 기사는 매일 아침 일간지로 접했다. 오전 여덟 시에 일어나는 편이라, 그때 신문을 읽는다. 17일부터 거의 한 달은 세월호 사건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세월호 침몰과 함께 나라도 침몰했다’같은 수사들이 있었다. 당시에 신문스터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문의 소식도 번갈아가면서 볼 수 있었는데, 사고 이외의 이슈는 거의 다루지 않더라. 신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단 게 기억난다. 아이들의 증언이 반복되어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다. ‘엄마 물이 차‘ ‘선생님 사랑합니다’ 같은.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루는 면은 아예 읽지 못했다. 다른 스터디원들이 고통을 호소했던 것이 기억난다.

 

여기서 냉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서 벌어졌지만, 정확히 봐야지만 그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겨레의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기획은 절대 읽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안 봤다. 그런 문제의식으로는 사건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 아닌 기사를 전혀 안 읽었다면 기억을 할 리가 없다. 신문을 넘기다 보면 보이니까, 읽다가 울기도 했고. 아직도 그렇다.

 

트위터에도 세월호 사건이 아니고는 다른 내용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내용을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이야기를 쓴 사람도 있었는데 지탄을 받더라. ‘니가 이 시국에 어떻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나?’ 이런 마인드. 오지랖이 태평양이다. 슬픈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올린 사람이 세월호 사건을 잊고 재밌게 지낼 거라고 생각하는건지. 비슷한 맥락에서, 노란 리본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친구들이 “개념 없이 왜 노란 리본을 달지 않느냐?”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는 건 좋은데, 그걸로 뭔가 ‘보상’이나 ‘참여’했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지적을 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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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6일 진도 팽목항 ⓒ이재각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몇 주 뒤에 사촌 동생이 놀러 왔다. 사범대에 다니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자신의 미래와 연관된 일이라 힘들어했다. 어느 날 열람실에 있는데, 열람실이 배고, 공간 전체가 물로 차오르는 환영을 봤다고 말했다. 본인이 앉아있는 곳까지 물이 차오르는 듯한. 당사자가 아닌, 사건에 영향을 받은 이의 이야기인데도 그 얘기를 듣고 숨이 막혔다. 내가 있는 곳이 물에 차오른다는 환영 자체가. 이때쯤 신문 스터디원들이 신문을 전혀 읽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면서, 집단 트라우마가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약 이 사건이 장기화된다면, 어쩌면 우리가 국가에 집단 소송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배가 빠지고, 탑승자들이 사망한 것도 큰일이지만 그 뒤의 일도 엄청나게 크다. 유가족들이 효자동과 KBS에 갔던 일들. 거기에 공권력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본 것도 힘들었다.

 

몸 상태도 좋을 수가 없었다. 휴학을 했던 게 좀 다행이었다. 사람을 최소한으로 만났고,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지 못했다. 지금 이야기를 하고있는게 신기하다. 고통이 심한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6월 10일에 침묵시위를 촬영했다. 그날 저녁에 ‘청와대로 가자’도 있었다. 비가 엄청 많이 왔었다. 헤엄치듯 걸었다. 태풍인지 호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아침에 나가서, 촬영 다 끝나고 카페에서 옷을 말리고 집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촬영은 잘 됐다. 비가 오니까 더 ‘그림’이 잘 나오더라. 참여자들은 비옷을 입고, 꽃을 들고 행진을 했는데 그게 드라마틱한 효과를 불러왔다. 비를 맞으면서, 자기 시간을 할애해서 그 종이와 꽃을 들고 자기 의지로 걷는다는 게 쉬운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우적거리면서 빗속을 행진하면 근처 상인들이 다 쳐다본다. 그냥 구경거리 같다. 생각보다 전혀 낭만적이지 않고, 멋진 비폭력시위 같지도 않다. 굉장히 구질구질하다(웃음). 차들이 절대 봐주지도 않는다. 클랙슨도 울리고. 도보이자 차도인 홍대의 그 상가 사이를 일렬로 걸은 거지. 간혹 비켜서 있다 걷고. 동료가 잡혀간 은평경찰서에도 갔었다. 연령대가 다양했다. 20대 중반 60대 중후반까지. 면회는 일대일이 아니었다. 서울 지역 내 유치장이 부족해서 광화문 집회인데도 은평까지 이송된 거다. 48시간 이내에 풀려났긴 했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자살률 통계를 잡을 수 있을까? 왠지 늘었을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렇게 길에 나가서 적극적 행동을 보인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 같다. ‘여기서 견디지 못하면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서, 그래서 뭔가 해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습관적인 죄책감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감정 이입하는. (기자(이하생략): 저의 경우, 너무 추운 날 바깥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떠오르면 죄책감이 이삼 중으로 느껴진다. 내가 죄책감을 가질 자격이 있나 싶다. 유OO :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 / 그렇다. 사회적으로는 이런 죄책감이 무가치하게 보일 것 같아서. 그럼 나는 쓸모없어진 생각이 든다. 세월호 참사도 비슷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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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4일 광화문 ⓒ정운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사람들이 슬픔에 전염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슬픔보다 무기력증을 더 느꼈다. 죄책감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쌍용차 관련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나도 자주 든다. 그렇지만 이 사건 이후에는 슬퍼하지 말자는 생각이 강했다. 슬픔으로 이걸 끝내고 싶지 않았다. ‘끝에서 끝까지’ 꼭 가져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를’ 절대 용서하지 말자, 이걸 꼭 반드시 기억하자. 울고 끝내지는 말자.

 

한창 유가족들이 국토순례를 하고 있을 때 밀양으로 농활을 갔었다. 나에겐 세월호만큼 밀양이 중요한 이슈였다. 오전 8시, 오후 2시 이렇게 두 번 할머니들이 시위를 하신다. 내가 갔을 땐 송전탑 공사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이미 막는 게 무의미한 상황인 거지. 마을 어귀를 막는데, 송전탑 관련 핵심 관리인은 헬기로 이동한다. 막을 도리가 없다. 다시 생각해보니 2014년은 정말 무기력했다. 아무튼, 밀양에 있던 마지막 날, 주민들을 돕기위해 마을 어귀에 앉아있었다. 마지막 날 여경들이 오더라. 그냥 경찰과 여경이 오는 건 다르다. 우리 몸에 손을 댄다는 뜻이다. 50명. 그 좁은 마을 어귀에 그렇게 올라오더라. 완전 공포였다. 

 

결국, 담론과 슬픔은 미디어가 만든다. 부인할 수 없다. 밀양에 가서 경험했다는 것 자체가 미디어에서 많이 다뤄졌었다는 뜻이니까. 대안언론으로서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했다. ‘배에 사람들이 빠진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가 더 크다’ 와 같은 글도 썼다. 노란 리본 대신 로고를 흑백으로 바꿨고,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꽤 했다. 언론에 문제가 많다는 건 다들 공유하는 인식이다. 당연히 회의가 들었다. 

 

기레기가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세월호 이후 계속 생각했다. 그건 ‘뭔가를 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게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다. 계속 문제 제기 된 것이 뉴스리포팅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속보를 계속 내다보면 새로운 내용이 필요하다. 유가족에게 가고, 학교에 가게 되고, 사물함을 여는 등 ‘다른 것’을 하게 된다. 누구보다 빨리 써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늘리면 자연스럽게 이런 실수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기성언론의 평기자들에겐 해야 하는 것만 있다. 취재지시를 하는 데스크와 기자들의 요구가 서로 다르다. 물론 자신이 특종 욕심이 있어서 사물함을 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저들이 그럴 수 없다는 사람들이 판단한 ‘기레기’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라면 누구든 오보를 내고, 자극적인 단어를 쓰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일어나서 ‘내 기사가 이렇게?’ 라고 느끼는 기자도 많다고 생각한다. 잘 참으면 계속 있는 거고. 내 기사의 최종본이 어떻게 나갈지 알려주는 언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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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6일 안산- 서울 광화문 1박2일 행진, 여의도 지나는 길 ⓒ최형락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19살 때의 일인데, 장자연 리스트가 보도됐을 때, 기자를 포기했던 적이 있다. 기사를 쓰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웃긴 얘기지만. 처벌받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어, 이거 뭐야. 열심히 하면 코난처럼 진실이 드러날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죽어서 알리고 싶었던 내용이 있었는데…’ 그게 산 사람들에 의해 송두리째 부정당했다. 나는 아직도 죽음 이외의 큰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그랬고. 장자연 사건이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위로를 많이 받은 건 기사보단 책이었다. <이 치열한 무력을>. 저자가 원전 이후 일본에 대한 대담을 옮긴 책이다. ‘글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는 무력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 책에 따르면, 무력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 정부도 무력하고 도쿄 전력도 그렇다. 그렇다면 미군은 힘이 있을까? 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전 세계에서 실패하고 있는 그 군대가? – 결국, 무력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 치열한 무력을’ 중에서)’ 굉장히 좋은 글이라 힘들 때마다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고 생각한다. 이젠 좋은 기사를 쓰고 싶지, 그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내 힘이 닿지 않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만 좀 하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온다) 여기엔 미디어 잘못이 아주 크다고 생각해서 분노하는 편이다. 정보가 너무 많았다. 질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 그만 좀 하라는 게, 사실 아직 한 게 별로 없다. 근데 그들의 모습을 질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작전으로 보일 정도였다. 물론 뉴스가 있어야 매체는 살아남는다는 것을 안다. 진보-보수 상관없다. 한겨레의 ‘잊지 않겠습니다’같은 기획은 이슈를 감정적으로 소비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알아야만 했던 일은 3분의 1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작은 정보의 조합으로 사람들을 너무 크게 분노하게 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 자살률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소식을 보다 보면 예민한 사람으로서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거다. 내 스스로는 어디에서 내가 무엇이 되든, 슬픔으로 소비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끝까지 가져가서 기억하는 일. 동생이 특례입학이 사실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사람이 죽었는데 특례입학을 어떻게 하나. 정확한 정보를 알고, 저런 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랫동안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 살아남고 잊지 않는 거.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인 것 같다.

 

기억에 대한 증언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정도까지 오진 않았겠지’ 하는 게 다 무너졌다. 물론 이 시대가 미쳐 돌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공동의 기억 같은 게 생겼다. 세계는 조금씩 개선된다. 그게 우연이든 제도에 의해서든. 기억이 어떻게 교류될지는 1주기가 되고 2주기가 되고,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건 믿고 싶다. 다들 정말 많이 힘들어했고, 무관심해진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아주 힘들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 것뿐이라는 것. 그 정도는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희망이… 인간의 ‘기억’에 대해 희망을 가져야겠다. 나부터 살려면 그걸 믿어야 할 것 같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내가 내 발로 서려면. 우리가 견디려면. 견뎌야 생각을 하는 거니까.

 

 

*[뭍위에서] 기획에서 인터뷰이의 이름은 인터뷰이의 의향에 따라 실명 혹은 익명으로 기록했습니다.

 

인터뷰.글/ 블루프린트 (41halftim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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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ain't hard to tell

1 Comment
  1. Avatar
    걍사람

    2015년 6월 10일 06:20

    잘 읽었습니다. 기사를 쓰는 사람이 있는 한편 기사를 읽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력감 느끼지 마시고 좋은 기사 많이 써주십시오.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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