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을 계속 출연시키기로 한 JTBC에 대한 보이콧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사태에 문제를 느낀 시청자들은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채널 불매’를 선택했다.  보이콧은 지금도 조롱받고 있다. 그것은 장동민의 발언을 여성혐오로 지적하는 말들이 계속 공격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의 프로그램 잔류를 보는 내 시각은 복잡해졌다. 내가 예능을 보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혐오발언을 하지 않는 출연진들의 활약약에 안심하고 웃고싶어서 였는지, 나 역시 ‘백마디 중 한 마디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던 것은 아닌지와 같은 자아성찰 수준까지 나아갔다. 여기에 연예인의 행동을 어디부터, 언제부터 용납 가능한 범위에 넣을것인지까지 이어졌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혐오발언을 한 예능인들을 피해가면서도 ‘존잼’인 제3의 예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케이블까지 채널을 돌려봤지만, 세 사람이 안 나오는 방송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안 나오는 방송을 찾는다고 해도 그게 내 취향일지도 불확실했다. 쏟아지는 예능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깐 관찰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크라임씬2]을 계속 시청하기로 했다. 시즌 1부터 봐온 정 같은것도 있었다.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게으른 대답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크라임씬의 출연자들은 매회 추첨을 통해 부여된 롤에 따라 추리플레이를 한다. 그 구조상 연예인들이 으레 등장하는 예능보다 ‘근황토크’의 비중이 적다. 장동민의 팟캐스트 발언 논란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볼 수 있을 정도로, 프로그램의 맥락은 철저히 추리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특징때문에 그나마 크라임씬을 계속 시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능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다. 장동민의 모든 말에 안 웃는 건 불가능했다. 나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이기도 했다. 죄책감과 즐거움 사이를 오가면서도 크라임씬을 끝까지 봤다. ‘나는 장동민이 아니라 크라임씬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암시는 별 효과가 없었다. 추리에 몰입해 토론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정말 아무일도 없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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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브이데일리

 

 

한편 출연자의 실제상황이나 소식이 그대로 주제가 되는 예능에서도 혐오발언은 소소한 웃음이 된다. 피해자가 존재하는, 일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금기를 슬쩍 피하게 된다. 그 순간 혐오발언과 불분명한 사과는 지나간 과거로 그 시제를 달리한다. [나를 돌아봐] 같은 예능이 마치 ‘상처입은 장동민을 위한 위로의 장’이 된다. 고정패널에서 게스트만 한 두명 투입되는 [크라임씬2] 역시 그런 해프닝을 나누는 공간이다. 입조심 하라는 장동민의 ‘역조언’을 출연자들은 웃어넘긴다. 혐오라는 ‘께름칙’한 주제를 대놓고 드러내기는 싫으니 그것을 일상의 에피소드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밖에 없다. 손쉽게 조언자의 위치를 점하고, 불편한 구설수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참 편한 선택지다. 비판을 받는 상황조차 ‘주인공’이 되기위한 구도로 세워지는 한국 예능의 현실이다.

 

 

구설수에 웃을 수 있는, 웃길 수 있는 권력

 

이것이 2015년만의 일이 아니듯, 옹달샘 멤버들만 혐오발언을 하는 것 역시 아니다.[결혼 터는 남자들]이나 [비정상회담]에서도 패널들이 해온 성차별적 발언은 다른 ‘웃긴’말들에 묻힌다. 예능을 넘어 드라마나 시사교양 장르에도 이런 경우는 흔하다. 기사화가 되지 못하는 여성 및 소수자, 사회적 약자 혐오 발언은 방송에 넘쳐난다.

 

물론 그것이 ‘왜 장동민만 욕하냐’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는 비판 역시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다. 팟캐스트 역시 ‘코미디언’이라는 세 사람의 정체성을 걸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과 했으니까 됐잖아?”식의 태도 역시 ‘누구에게, 무엇이’가 빠진 불분명한 사과가 ‘방송 복귀를 위한 만능 절차’와 동의어가 될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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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크라임씬2] 방송화면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출연자만 나와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런 검증을 어떻게 할지도 불분명하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거대자본과 인력, 기획으로 제작되는 예능들이 큰 기대를 불러모은 만큼, 프로그램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불특정 시청자들은 혐오가 편집된 프로그램을 요구 할 수 있다. “(그들이 없으면) 볼 게 없다”는 푸념은, 결국 그들의 코미디 방식은 영원히 주류여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혐오하지 않으면 웃길 수 없다는 두려움도 숨어있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웃고싶지 않다는 심리의 증명이기도 하다. 웃기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어도, 웃음의 질에 대한 기준은 만들어나갈 수 있다. 거기에 시청자의 요구가 반영되는 것은 갑질이 아닌 방향성의 전환이다. 

 

팟캐스트 논란 이후 장동민에게 쏟아진 섭외요청은 얼마나 될까? 혐오 발언한 사람을 내보내기 어렵다면, 그 분위기와 구조라도 영영 퇴출시켜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예능은 후자를 실천할 의지가 있는가? 이제 혐오는 방송에서 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기는 더 험난해질것이다. 논란이 한창일 때 [크라임씬 2]에서는 ‘홀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자들 다 도망간다’와 같은 말이 편집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송을 탔다. 우리가 걷어내야 하는 것은 그런 ‘변화 아닌 변화’다. 이것은 제작진과 출연진의 눈치 탓이 아니다. 애초에 혐오가 어디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 무지의 발현이다. 

 

글. 블루프린트(41halftim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