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는 ‘즉각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휙휙 지나가는 트렌드들을 세세하게 짚고 넘어가기보다는, 아직 표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현상의 단면을 조악하더라도 빠르게 훑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트렌드20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연재 ‘인스턴트’는 새로운 문화 현상이나 숨어있던 현상들을 짚어내어 스케치하고자 한다. 취미, 컨텐츠, 소비 현상들을 엮어내, 생활 방식을 파악할 수 있길 희망한다.

 

영화[위로공단]을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가족주의적인 작품이 아님에도 말이다. 몰염치한 동일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노동하는 어머니가 아닌 ‘여성’ 노동자.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출근을 위해 새벽 4시에 집을 나서고 8시에 퇴근해 귀가하는, 월 130만원 받는 장기 계약직. 그러면서도 같은 급여를 받는 단기 계약직에게, 장기계약직이 직접 재계약 불가 통보를 해야 한다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래도 자신은 좀 낫다며, 그녀가 했던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 곱씹었다.

 

‘신화화’와 가족주의 없이 ‘노동’을 그리는 것

 

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노동영화’의 측면에서 헛발을 치기 쉽다. ‘근대화의 신화’와 가족주의 앞에서 산업노동자는 산업 ‘역군’으로 변모한다. 작년 개봉한 ‘국제시장’이 그랬다. 구조의 문제는 가벼이 ‘시대’에 떠넘겨지고, 노동자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은 70, 80년대 대한민국 ‘근대화의 신화’ 앞에 무너졌다.

 

영화 [국제시장]의 영문 제목 ‘ode to father(아버지에게 바치는 송가)’가 보여주는 가족주의적 성격만큼 ‘노동’의 얼굴은 지워졌다. 가족주의와 ‘신화화’를 지운 ‘노동자’가 영화 속에 존재할 수는 없는 걸까? 그 마음을 가지고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을 만났다. 가족주의 아래 ‘어머니’와 산업 ‘역군’ 이름표를 뗀 사람들, 그들을 이야기하는 영화. 단순 여성노동자를 다룬 영화여서, 인터뷰 중심의 다큐멘터리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아. 상업영화가 아닌 것은 그 이유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 [위로공단]은 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여성운동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여성노동자’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라는 감독의 말이 무색할 만큼, 영화에는 ‘어머니’나 ‘여동생’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이 없다. 90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는 여성노동자 인터뷰 중 ‘엄마’라는 단어 한번 등장하지 않는다. 가족주의가 덧칠된 ‘그래도 엄마니까’와 같은 감상에 젖을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간에 ‘아이들 원하는 것 배우도록 지원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슬프다’라는 장면 하나가 존재하지만, 이마저도 가사노동, 보살핌, 감정노동 층위로 가족주의가 어머니에게 강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머니에게 강요되는 색을 지우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롯이 노동자로서 감각된다. 신화화에 한몫하는 가족주의를 일면 부순 영화는, 중간에 삽입되는 캄보디아 장면을 통해 ‘신화화’의 나머지 한 다리인 시대성을 지운다. 지구 어딘가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구로공단. 나이키 공장에서 한 달 열심히 일해도 나이키 신발 하나 살 수 없는 근로자들. 야근과 철야, 그리고 절망적인 노동환경으로 채워진 여공1의 세계. ‘생산직 노동’의 문제는 70, 80년대 ‘시대’의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구조’의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캄보디아의 사례 이후 마트, 콜센터, 승무원 등 서비스노동 근로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캄보디아 사례를 통해 ‘노동’이 자연스레 시대가 아닌 구조의 문제로 귀결된다. 노동의 문제가 시대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전반부의 생산직 노동자의 문제가 후반부의 서비스노동 근로자의 문제와 닿게 되는 것이다. 여공1의 문제는 콜센터 근로자1과 닿아있다.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일한다. 행복을 보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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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로공단>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일 하나

 

‘가족주의’와 ‘신화화’시대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노동. 결국, 영화가 남기는 것은 ‘노동’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일이란 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영화에 삽입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인터뷰나 영화 위로공단의 카피가 좋은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일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것은 ‘생존’에 대한 강박이다. 너무도 익숙한 말처럼 우리는 직장과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일하는 것이 곧 직장 내에서 ‘생명’ 유지, 일상에서 생계 유지 만을 의미할 때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함’을 위한 노동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나는 [위로공단]을 단순 ‘대한민국 여성 노동사’를 정리한 다큐멘터리로 보지 않는다. 구로공단 연대파업, 기륭전자 사태, 삼성반도체와 김진숙 지도위원 등 여성노동사에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말이다.

 

구로 공단의 이름은 ‘구로 디지털단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더 나은 삶이 아닌 생존을 위해 일하고 있다. 노동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끊임없이 제기하는 영화는 ‘여성노동’을 통해 ‘일, 노동’ 자체의 의미에 관해 묻는다. 영화 중간, ‘구로공단에서 튕겨 나가면 술집에 취직해야 했다’라는 노동자의 말이 떠오른다. 생산직 노동의 뒤에는 성노동이 있었다. 어떠한 노동의 영역 뒤에는 더 열악한 다른 노동의 영역이 존재한다. 산업역군의 세계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여성노동자와, 더욱 비가시적이었던 다른 여성노동자가. 우리는 환상 속에서 누군가 ‘죽음노동’으로 이름 붙인 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노동하는 것일까? ‘노동’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글. 압생트(9fif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