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JOY.흥을 깨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여성혐오와 반성평등적 컨텐츠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 흥을 깨지 않으면 계속해서 번식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KILLJOY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단 한 번도 성평등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킬-조이] 연재를 통해 마음껏 고함20이 느낀 불편함을 말하고 설치며 흥을 깰 예정이다.

 

1 kill :: <대학내일>, 거부하는 여친을 꼬셔서 자는 게 진보라고?

 

야한 얘기, 특히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 ‘트렌디’한 줄 아는 <대학내일>에게 고함. 나도 야한 얘기 좋아하거든? 근데 이건 아니야. 개념 팔아먹고 섹스섹스하면 쿨해보일 줄 알았니?

@대학내일 #책좀봐 #이것들아 #그것은_썸도_데이트도_섹스도_아니다

 

<대학내일>에는 ‘3인 3색 연애상담소’ 섹션이 있다. 매주 연애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의 사연을 받고, 그에 대한 세 에디터의 각기 다른 의견을 들려주는 식의 구성이다. 14일에 발행된 750호 28쪽에 실린 이번 주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저는 ‘건강한’ 남학생입니다. 얼마 전 여친과 자취를 시작했는데 눈만 마주쳐도 미칠 지경입니다. 하지만 여친은 너무 자주하면 질린다고, 미꾸라지 같은 핑계로 커트하기 일쑤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 사랑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요?”

 

너무 자주하면 질린다, 옆집에 소리가 들릴까 걱정된다…. ‘미꾸라지 같은 핑계’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래서 여자친구는 너랑 섹스하기 싫다는 거잖아? 그럼 안 하는 거다. 섹스는 둘 다 하고 싶을 때 하는 거다. 하기 싫은데 계속 꼬시는 건 데이트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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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연에 대한 <대학내일> 에디터들의 상담 내용이 가관이다. 연인 사이의 배려나 존중은 배제된 채 어떻게 하면 여친과 잘 수 있는지에 대한 궁리만 남았다.

 

To 중도파 패널 :: 연인 간의 섹스는 노동도 의무도 아니다. 섹스 할당제라니,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의무적으로 횟수를 정해놓은 섹스는 ‘폭력’이다. “할당된 획수가 소진되기 전까진 엄청난 이유가 없는 이상 상대를 거부할 수 없게 약속을 해놓고요.” 연인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섹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이 규칙은 이민석 에디터가 말한 대로 섹스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간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자기도 “말도 안되는 규칙”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상관없다는 건가?

To 진보파 패널 :: 자신의 행동이 데이트 성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애인이니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이미 수없이 잤으니까 ‘이번에도’ 또 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는 그녀와 소통하려 하기보다 단지 동의를 얻어내고자 그녀를 압박하려 든다. 상대방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일 때면 그는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려주려고 한다. 사실 그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뿐인데 말이다.”

 

더 빡치는 건 상담을 해주는 패널들에게 ‘보수’와 ‘진보’의 딱지를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내일>은 섹스를 안한다=보수, 섹스를 한다=진보인 줄 아나 보다. 여친이 거부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상황적 맥락은 배제된다. 여친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상담 내용은 (섹스를 하지 말라는 얘기니까) ‘보수파 패널’의 의견으로, 궤변을 늘어놓으며 여친 옷을 벗기라는 상담 내용은 (섹스를 하는 거니까) ‘진보파 패널’의 의견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친이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아 하면 안 하는 거다. 스킨십에 대한 생각을 솔직히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다. 이때 중요한 건 존중과 소통이다. 무작정 내 욕구를 풀고 싶은 마음에 기-승-전-섹스로 이끄는 것은 ‘진보적’인 게 아니라 ‘데이트 강간’이다. 중도파니 진보파니 하면서 개소리를 쿨한 척 시전하고 있는 <대학내일> 에디터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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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ill :: 에스콰이어 편집장의 말 : 비겁한 변명들
 
 
남자가 불행하다는 성토는 ‘먹히는’ 주제다. 그래서 [결혼 터는 남자들],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 같은 프로그램이 나왔다. 그런 프로그램에서 김성주 같은 유명인은 초장에 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아이로 배우자를 협박했던 ‘썰’을 아무렇지 않게 푼다. [건축학 개론]의 여주인공은 “저런 ‘썅년’때문에 남자가 마음고생을 한다”고 두고두고, 아직도 까인다. 우리 남자들을 긍휼히 봐달라는 진지병 칼럼도 떠다닌다. 심심하면 남자로 사는 것이 고달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토가 매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은, 여성혐오와 억압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에스콰이어 편집장의 말을 요약하자면 ‘가뜩이나 힘들고 지치는데, 왜 우리 남자들한테 뭐라그래?’정도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서는 아예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를 낳았다. 부모도움 없이 남자 혼자의 힘으로 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에스콰이어 편집장이 말하는 ‘젊은 세대’에서 묘하게 여성은 빠져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여성을 제외했을지도 모른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것이 남성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아무리 남녀평등 시대라 하지만 남자가 받는 사회적 압박감은 훨씬 더 크다’는 문장을 보면 크게 착각하는 것 같다. 전세계 성평등 지수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겠다. 성평등은 완성되는 성질이 아니다. ‘다문화 국가’같은 단어와 마찬가지다. 한번도 만들어진 적 없고, 그게 온다고 하더라도 언제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시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성평등 시대이므로 모든 성별이 느끼는 사회적 압박감이 똑같아야 한다’라는 식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대를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제도가 필요하고, 이러한 사회적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처럼 쓰여야 하는 것이다.
 
‘남자들의 역할과 의무가 점점 늘어만 가고, 사회 전체가 남자를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는 문장도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경쟁하듯 요리하는 남자와 육아하는 남자의 모습에 숨이 막힌다’면, 그것이 새로운 풍경이기에 겁이 나서인 듯하다. 이제까지 요리와 육아와 맞벌이를 강요받은 여성의 존재에 대해 되돌아볼 생각은 없는지 궁금하다. 여자가 겪은 차별은 투정으로 치부되어 왔다. 가사노동이나 육아를 해야 할 것 같아 초조하다면, 징징대기에 앞서서 ‘당연히 해야 하는 데 피했던 것은 아닐까’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편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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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은 또한 ‘당시엔 남자로 산다는 것이 전혀 팍팍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면서 그때를 정상적인 것인 양 말하기도 한다. ‘그때 그시절’에 남자로서 ‘이득’을 더 많이 봤었다고 인정하는 것 같다. 남자로 살기 편했던 것은 한쪽의 희생을 담보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그 좋은 시절의 회복을 위해 여성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읽힌다. 전통적인 성 역할이 남녀 모두에게 족쇄가 된다면, 그것은 없애야 하는 악습이지 남자에게 더 짐이 되기 때문에 ‘불균형’하다고 말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전통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허세 부리느라 힘드니까 그 정도 권력은 당연한 거라고 이해해달라고 말할것인가?
 
찌질해 보일까봐 밥값 부담은 다 지지만, 의사소통하기 싫어서 여성혐오를 터뜨리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말로도 보인다.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게으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성 역할이 남성에게 불리하다고 치고, 여자를 여자보다 더 잘 안다는 듯한 태도로 맨스플레인을 서슴지 않는다. 허세가 힘에 부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분노가 표출되는 것을 두고 ‘사회적 균형’이 깨진다고 정의할 수 있는가? 분노는 애초에 적절하게 표출되어야 하는 감정이다. 혐오에 변명은 필요 없다.
 
여성이 더치페이를 하자는 남성을 매력적이지 않게 보는 것이 잘못일까? 그렇게 젊은 남성들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소비생활만으로 된장녀로 찍히고 더치페이 한 번 하면 ‘개념녀’가 되는 권력구도를 쥐고 있는 남성들에 대해서도 설명했으면 좋겠다. 더치페이를 제안하는 남자는 ‘김치녀’같은 사회적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PD수첩의 여성혐오 특집 역시 여혐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한 ‘메갤’이 생기자 그제서야 방송으로 만들어졌다.(PD수첩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전의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제대로 드러나지도 못했다는 소리다. 혐오가 아니라 그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김치녀’같은 여성혐오가 아무렇지 않게 편하게 오갔던 시절이 이 칼럼에서 그리워하는 과거인가? 
 
 
글. 달래(sunmin5320@naver.com). 블루프린트(41halftim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