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g1

메인이미지 원본  ⓒ조선일보 

 

* 아래는 조선일보 [태평로] 늙는다는 건 罰이 아니다 를 패러디한 답장입니다.

 

아버지, 제 편지를 보십시오. 저는 취업을 해야 할 4학년입니다. 그러나 취업은 코앞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임금 피크제란 말이 들렸습니다. 뜯어보니 우리 얘긴가 싶었습니다. 대통령이 말하는 4대 개혁의 본질은 ‘세대 전쟁’이 아닌 ‘세대 전쟁의 조장’처럼 들렸습니다. 불현듯 그게 아버지와 저 사이에 이간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찔했죠.

 

노사정이 합의한 노동 개혁의 첫머리에 ‘취업 규칙 변경’이란 게 있습니다. 점잖은 말로 포장돼 있어 그런지 무슨 뜻인지 전 모르겠습니다. 봉급을 깎는다는데 그게 어떻게 청년 일자리로 연결되는 것인지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부나 회사가 ‘여력’이 생기면 젊은 우리에게 일터를 만들어 준다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싶습니다. 실상 그 대책의 수준이 일회용 인턴이나 2년짜리 계약직에 불과하고, 재원 마련도 결국 동정심에 의지하는 ‘청년 일자리 펀드’에 그치지 않나요. 좋은 일자리를 붙박이처럼 얻는다는데, ‘좋은 붙박이 일자리’라는 정의에도 세대 차이가 있나 봅니다.

 

그래요. 한 발짝만 더 따져봅시다. 제 위에 형은 어쩌란 말인가요. 형은 3년간의 취업준비 끝에 겨우 입사했습니다. 원서만 쓰면 합격했다던 아버지 시절 이야기와는 다르지요. 물론 아버지가 아시다시피 형의 스펙은 뛰어났습니다. 토익은 만점에 가까웠고 서울에서 알아주는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나요. 대학 등록금부터 토익 학원 수강료까지 빚진 돈만 1천만 원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아파트를 얻기 위해 다시 또 빚을 지라는 건가요. 정말 아버지 생각도 그런 건가요.

 

아버지의 노후자금을 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사회 정의라면 건드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할 말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노후 자금을 두고 싸워야 할까요. 그게 사회 정의인가요. 헛간 같은 지하 단칸에 신혼을 살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던 아버지의 고됨을 왜 다시 또 혼자 지려고만 하십니까. 아버지가 평생 마련한 아파트를 헐어 다시 또 노후 자금으로 써야 하는 현실이 정녕 아버지가 생각하는 ‘사회 정의’인가요.

 

직장도 그렇습니다. 학점과 토익이 좋아도 인턴을, 인턴이 안 되면 벽돌이라도 날라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계약직으로 살아도 행복하라는 노사합의문이 들리더군요. 이게 저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저도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포기라기보단 강요된 현실이었죠.

 

힘은 합하고 고통은 나눠야겠지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저희를 볼썽사나운 무기력한 젊은 세대라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대기업 입사 경쟁률은 수백 대 일을 향하고, 젊음은 값싼 열정페이로 팔려 나갑니다. 어느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젊음은 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노동시장이 왜곡된 게 누구의 탓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벌을 받는 건 분명합니다.

 

징징대지 마십시오. 불혹의 나이는 미혹할 것이 없다더니, 그것도 불혹 나름인가 봅니다. 그저 주어진 것을 무비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게 말이죠. 앞서 말한 ‘임금피크제가 청년 일자리 창출이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녀들이 자신의 노후자금을 탐한다는 생각만 보면,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매일 ‘우리 때’는 이라 시작하고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아라’라는 말도 뻔했습니다. 그것도 인턴이란 명목 아래, 아버지 또래의 아저씨들과 술잔을 기울면서 들은 수많은 반복이었지요. 주량을 넘어서도 ‘사회생활은 그런 거다’라는 말속에 소주잔을 비워내고, 상사의 노래에 미친 듯이 탬버린을 흔들며 눈물을 삼켰다는 건 아버지는 모를 겁니다. 설령 아셨다면 이런 글을 쓰셨겠습니까.

 

그러나 나라 상황이 저러니 양보하라면 양보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바라는 게 순종밖에 더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를 죄인 취급하면 섭섭합니다. 정말 화산처럼 분노할지 모릅니다.

 

 

글/사진편집. 종자기(kpj60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