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에서도 말했지만 ‘다이어리 관음기’에서 다이어리란 단순히 일기장이라기보다는, 날짜별로 간단히 글(일정, 감상)을 쓸 수 있는 수첩을 말한다. 그런데 C는 정말 ‘다이어리’를 들고 나타났다. 관음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사람으로 손꼽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다이어리를 들고 올 줄이야. 먼저 물어보아야 했다. “C, 이거 내가 봐도 되는 거 맞니?”

 

C는 천천히 자신의 다이어리를 펼쳐가며 찬찬히 정독하고, 보면 안 되는 페이지를 세로로 반 접었다. 일기장이라 해서 깨나 소중히 다룰 줄로만 알았는데 접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C는 검열과 재검열을 거듭했다. 한참을 기다리다 이제 끝났나 했더니 “다시 한 번 검열할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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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일기장을 가져온 사람은 처음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 한 번 더 봐야 한다. 이상한 이야기는 검열해야겠다. 우울하거나 민망한 이야기. 도저히 보여줄 수 없다. 꼬깃꼬깃 접을 테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당연하지, 일기장이니까. 새파란 색의 손바닥만 한 노트라 스케줄러쯤 되는 줄 알았다.
올해 초에 산 다이어리다. 스케줄러는 아예 따로 쓰고 있다. 정말 딱 스케줄만 쓰기 때문에 보여줄 것이 없다. 요즘은 스케줄러에 좀더 집착하는 편이지만, 일단 이 다이어리는 자기 전에 쓰고 있다.
사실 플래너도 따로 있다. 플래너는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담는다. 몇 월 며칠까지 뭘 해야 한다는 식의 우선순위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스케줄러를 작성한다.

일상의 삼권분립이군. 그럼 이 일기장의 지위는 어드메인가?
한동안 잠자는 일에 큰 문제를 겪었다. 밤낮이 사라지는 바람에 일기도 쓸 수 없었고. 그래도 일기를 써 버릇하면서 수면 패턴을 다시 세우는 효과를 보았다.

알겠다. 아, 펼치자마자 드는 생각은 ‘글씨가 아름답다.’
남들이 나더러 글씨를 못 쓴다고들 하는데 사실 내 글씨를 무척 좋아한다. 글씨 못 쓴다는 이야기는 늘 들어왔던지라 이제는 못쓴다고 하면, 오히려 약간 좋다. 나보다 더 못쓰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가 난다.

다이어리를 연필로 쓰는군. 어떤 이유가 있나?
지워지는 것이 좋다. 어떤 글을 쓰든 항상 연필을 쓰긴 한다. 키보드로 타이핑을 하면서 글을 쓰면 뻘소리를 하게 되거나, 아주 반대로 정제된 이야기만 쓰게 된다. 연필은 그 중간 지대, 다시 말해 아주 뻘소리는 아니면서도 거짓 없는 솔직한 글을 쓸 수 있다.

잠들기 전 무엇에 대해 쓰는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느꼈고 하는 식이다. 원래는 감정적으로 썼는데 그랬더니 약간 통제할 수 없는 글로 흘러가 버리곤 했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있었던 사실에 대해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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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도 굉장히 많다.
엄마가 “너는 그림을 못 그리니 남들에게 보여주지 마”라고 이야기해서 그림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내 그림이 너무 좋다고 했다. 마음에 든다고.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겨서 그리기 시작했다.
일기에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종의 원칙이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쓰고, 그림은 꼭 그리기. 물론 안 지키는 날도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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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도 흥미롭다. 낙서들을 조금 소개해달라.
실타래는 머릿속이 혼란스럽다는 뜻이다. 이건 아마 뮤지컬 로기수를 본 날인 것 같고.
요즘은 그릴 것이 없어서 스티븐 유니버스 캐릭터를 그리곤 한다.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이다. 항상 스티븐 유니버스를 보면서 구원에 대해 생각한다. 내 일상을 구원하고 있고, 다들 구원받지 못한 캐릭터라는 생각도 항상 한다. 좋아하는 모티프들도 여럿 등장한다. 또 중요한 점은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입체적, 다면적으로 표현하는가에 있다.
그중에서 펄과 라피스라는 캐릭터가 너무나 예쁘다. 나와 가장 닮은 캐릭터는 아마 페리도트인 것 같은데 이 낙서는 누군가에게 내가 화를 내는 장면을 페리도트로 묘사해 그린 것이다.

7월엔 대만에 다녀왔군.
이때는 원칙을 깨고 마구 썼다. 상하이 철판만두가 맛있었다. 망고를 던지듯이 막 넣은 빙수도 먹었다. 
작대기를 긋고 짧은 단상을 여럿 남기기도 하였다. 거긴 트위터가 안 됐기 때문이다.

다이어리 맨 마지막 장에 포켓이 붙어 있다. 무엇이 들어 있나?
흑역사다. 도무지 보여줄 수는 없다. (포켓 안 종이를 들춰보며) 이 다이어리를 산 날은 1월 11일이다. 내 인생 흑역사 중 하나로 부적 같은 것이다. 왜 버리지 않고 넣어두었냐고? 가끔 길티 플레져처럼 본다. 제발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도 하고.

다음 일기는 5월 7일부터 재개됐다. 4개월은 어디로 갔나?
안 썼다. 트위터를 열심히 했다. 아니, 상대적으로 열심히 했다고 볼 수는 없고 일하느라 되게 바빴다. 에너지 소모가 굉장히 심했던 시기였다. 여러 일들이 겹쳤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 이후로는 제법 꾸준히 썼다. 인생에 대한 기억을 좀 정리하는 시기가 필요했다. 3월, 4월은 심각한 우울감에 빠졌고 그때쯤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겨 이야기할 상대도 마땅치 않았다. 마음이 어려웠고 살도 부쩍 쪘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기를 썼던 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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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최근에는 되레 안 쓴다.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몸이 좋아졌고 사람들과 마주해 안온하게 살고 있다. 여유로운 시기다. 약간 불행하고 바빠야 일기장, 스케줄러, 플래너 세 개를 모두 쓴다. 태평성대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

그럼 요즘은 자기 전에 뭘 하나?
아까 말했듯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리고 잔다. 일기 대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도 있다.

내게도 한 장 부탁한다. 답장하겠다.

 

 글. 이매진(4stagion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