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는 ‘즉각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휙휙 지나가는 트렌드들을 세세하게 짚고 넘어가기보다는, 아직 표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현상의 단면을 조악하더라도 빠르게 훑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트렌드20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연재 ‘인스턴트’는 새로운 문화 현상이나 숨어있던 현상들을 짚어내어 스케치하고자 한다. 취미, 컨텐츠, 소비 현상들을 엮어내, 생활 방식을 파악할 수 있길 희망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
라는 관용구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은 우리의 세계가 ‘겉과 속을 같은 것으로 포장하는 세계’임을 반증한다. 여기서 겉과 속에 대응될 수 있는 것들이 많겠지만, 영화감독 홍상수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반복이 만드는 겉’과 ‘차이로 존재하는 속’이다.

 
‘반전’ ’서스펜스’가 넘쳐나지만, 정작 ‘겉과 속이 다른 영화’는 찾기 힘들다. 그 ‘세계’가 고루하고 전형적이라면, ‘반전’이라는 수사는 서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반쪽일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늘 즐거움을 주어왔다. 굵은 서사 없이 인물들과 세계의 균열, 그 ‘겉과 속’의 다름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감독이란.

 
그 뿐 아니라 너무나 당연했던 언어와 문법에서 모순을 찾고 공허를 드러내니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겉과 속이 다른 감독’ 아니겠는가.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약간의 차이를 두고 거의 비슷한 구도와 대사가 1부와 2부로 반복된다. 다시 말해 ‘거의 비슷하다’ 중 ‘거의’에 내포된 작은 차이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를 끌고 간다. 지금부터는 그 지루함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홍상수 세계의 ‘겉과 속’이 다름에 대해.
 
 

반복이 만드는 겉의 세계

 
‘(주제의식이 집약된)깔때기 같은 영화는 싫다.’
-홍상수 감독 2010년 작 <옥희의 영화> 중 남진구(이선균 분)

 

아이러니하게 감독이 공을 들일수록, 영화 속의 모든 메커니즘이 치밀할수록 세계에 대한 관객의 해석 폭은 줄어들기 쉽다. 이선균의 대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았다. “영화관을 나올 때, 모두의 가슴에 동일한 한 줄의 주제의식을 품게 하는 영화가 싫다.” 주제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화 밖의 현실에서는 이러한 ‘주제 의식화’가 더욱 팽배하다.
 
 
영화는 각기 다른 장면들로 이뤄지지만, 한편으로는 끝까지 서로 다른 장면이 교차되는 ‘신scene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가족주의적인 장면, 키스신, 카체이싱신과 총격전 장면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비록 각기 장면이 서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깔때기 같은 주제의식 아래에서 축적과 반복이 계속된다면, 관객은 그 밖으로 나가 해석함을 두려워한다.

 

모든 주제의식을 부정하는 남진구의 대사가 ‘어떤 주제의식을 지니는가’의 측면을 고려치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복되는 노출을, 그리고 이를 통한 ‘주제의식’의 공고함을 경계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반복과 반복을 통해 축적되어 성립된 가치들 바깥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계에는 진정 ‘감독’과 같은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위치에서 법을 만들고, 언어를 재구성할 뿐 아니라, 도덕을 정의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차이가 만드는 속의 세계

 
영화라는 형식과 반복은 뗄 수 없지만 그럼에도 홍상수는 항상 동시에 차이에 주목해왔다. 이는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서로 다른 두 그림을 붙여보고 싶었다’라는 ‘반복’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실제와 닮은 인물들을 섭외했으나 차이가 존재했다’라는 대사를 통해서 그 차이에 관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역시 같은 공식을 따르고 있다. 1부와 2부가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거의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이와 함께 대사와 반응, 카메라 구도에서 존재하는 작은 차이와 끝에 이르러서는 작은 차이들이 만든 ‘사건의 변화’라는 큰 차이도 같이 보여준다.

 

차이는 반복의 권위를 저하시킨다. 반복이 어떤 동일한 신화로 이어짐을 방지하는 것이다. 차이가 반복의 성질을 명확하게 하고, 세계가 다층적임을 드러낼 때 계속 반복됨이 계속해서 동일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이 아래에서 우리는 ‘법과 도덕과 문자,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안정적인 언어’의 틈새를 볼 수 있으며, 틀렸던 그때와는 다른 지금을 맞을 수 있다.

 
두 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 속에서 주제의식의 반복이 사라졌을 때 홍상수 영화를 보는 관객은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려는 거지?’ 관객은 낙담하고 그냥 잠에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차이’를 찾아야 한다. 차이를 찾고 반복이 곧 동일함이 아님을 알 때, 수동적인 개인은 ‘능동’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영화 바깥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약된 주제의식들이 넘쳐나는 세계 속에서 ‘보여지는’ 반복을 마주하고, 그 반복 영역 바깥에 있는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이 징후가 이데올로기던, 브라운관 속 ‘악마의 편집’이던 간에 반복과 차이를 마주할 때 다른 차원을 꿈꾸는 것은 가능해진다. 틀렸던 그때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금의 답이 여기 있다.

 

 

메인 이미지 :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포스터

 

글. 압생트(9fif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