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이슈팀의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텍스트를 소개하려합니다. 공부합시다!

 

지금까지 늘 궁금했다. 대학은 왜 가야하는 걸까.

 

선생님은 내 질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을 가고 번듯한 직장 얻고 그래야 괜찮은 사람이랑 결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이상하다.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이 대략 삼 천 만원. 최저시급이 5580원이니깐 672일. 간단히 계산해서 2년 가까이를, 주말 없이, 하루 8시간씩을, 꼬박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이다. 차라리 이 돈 가지고 치킨집이라도 차리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말은 이렇게 해도 흙수저의 원죄를 속죄하듯이 꾸역꾸역 남들처럼 버티며 나는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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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통 트위터  ‘아직은, 불행하지, 않다.’

 

흙수저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 데 하류지향이라니?

 

그러나 하류지향이라는 도발적인 단어와 함께 이 한국사회는 나를 현실에 안주하며 국가경제에 위협이 되는 나태한 젊은이 취급을 하고 있었다.

 

‘하류지향(下流志向)’적인 젊은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큰 성공이나 부유함을 바라기보다 적당히 현재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며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 (…)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이처럼 하류지향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날 경우 경제발전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ㅡ 헤럴드 경제, 하류지향(下流志向) 세대…현실에 안주하는 젊은 직장인들


아직도 빌빌대며 사는 건 내가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서그렇다고 말이다. 근데 하류지향이 진짜 이 뜻일까. 직접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하류지향’은 우치다 다츠루의  <하류지향: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그는 일본의 큰 사회적 문제인 학력저하와 니트(NEET: 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ing) 현상을 분석하면서  젊은이들이 ‘공부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하고 있다고 보았다.

46245-1ⓒ 헤럴드 경제 / 너희땜에 머리가 다 아프다

 

우리는 왜 배워야 합니까?

 

우치다 교수에 따르면 앞서 내가 가졌던 의문은 당연하면서도 멍청한 질문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관계를 ‘소비주체’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용도와 유용성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에 들면 사고 아니면 사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교육의 영역에서는 시장 원리를 기초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배움’엔 등가교환의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 학습은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르고, 배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하는 ‘시간적인 일’이다. 교환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야 비로소 우린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모국어를 학습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시장원리는 교육에 침투하고 있다. ‘아프니깐 청춘이다’와 같이 ‘자기책임ㅡ자기결정의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한다. 강자가 승리하고 약자는 먹힌다. 정부와 언론이 앞장서서 이를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의 공평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리스크화’와 ‘양극화’다.

 

더 이상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다

 

학교는 사회의 ‘파이프라인 시스템’이다. 이는 개인의 노력과 성과에 맞춰 그들에게 직업과 계층을 배분한다. 파이프라인은 노력이 곧 결과가 되는 능력주의의 기초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파이프라인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입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균열과 누수도 생겼다. ‘노력=결과물’의 확실성이 사라져가는 ‘리스크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어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은 사람과 보상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생기는 ‘양극화’가 나타났다.

 

문제는 사회가 이 불공정한 경쟁을 위해 여전히 문제 많은 파이프라인 기능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불평등한 결과를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회는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의 논리를 들이민다.  내가 참여하기로 한 불공정한 경쟁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 바로 리스크의 개인화다.

 

우리는 모두 고립된 인간이다

 

공정한 경쟁은 노력할 동기가 모두에게 평등할 때나 가능하다. 그래야 결과가 불평등하더라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리스크 사회에서 금수저가 계속 금수저일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경쟁에서의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을 해야할 동기’를 찾는 데 있다.

 

금수저같이 리스크가 적은 계층은  ‘노력=결과물’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흙수저와 같이 리스크가 많은 계층은 ‘노력할 동기’ 자체가 사라진다.  예를 들어 가난한 부모를 둔 자녀들은 학력의 쓸모를 믿지 못하게 된다. 부모가 저학력이라면 고학력의 의미를 경험해본 적이 없을 테고, 고학력이라면 ‘대학 나와 봤자 가난한데 뭐.’ 하고 효용성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흙수저들의  ‘노력할 이유’는 사라진다.

 

노력한 만큼 평등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경쟁자체가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리스크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고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다. 우치다 교수의 말처럼 흙수저는 결국 구조적 약자들이다. 사회적 안전망과 인프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리스크를 혼자 부담할 필요가 없다.

 

흙수저들만이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을 강요받는다. 이를 위해 교육행정과 대중매체는 그동안 ‘고립한 인간’을 ‘자립한 인간’처럼 왜곡시켜 왔다. 계층 하강을 자기가 결정한 것으로, 또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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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통 트위터  ‘아직은, 불행하지, 않다’

 

헬조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우치다 교수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회 전체적인 성찰과 함께 사회 인프라와 안전망 구축을 주장했다. 결과에 따른 책임을 공유하고,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의 리스크를 사회가 함께 부담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외면하지는 말자. 저들은 구조적 약자이니깐.

 

그런데 이 개념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헤럴드 경제의 기사처럼 묘하게 변질되었다.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하류지향의 개념을 개인적 문제로 왜곡시켰다. 책을 읽고 나서도 “너희가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 흙수저에 머물고 있고, 지금의 이 고통은 ‘아프니깐 청춘’이니 열심히 참아보거라. 버티다 보면 너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실패하면 어떡하냐고? 그건 네가 결정했으니 스스로 책임져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저 사람들을 헬조선 특유의 환경적 변종으로 봐야할까, 텍스트 해독 지능의 차이로 봐야하는 걸까. 뭐, 어찌됐던 악질적인 의도임은 분명하다.

 

글. 이주형(mangha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