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1958년 이른 새벽, 결혼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때, 익명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보안관과 동행 두 명이 신혼 부부의 집을 급습했다. 그들의 결혼은 버지니아 주에서는 불법이었다. 부부는 풀려나는 대신 버지니아 주를 떠나 워싱턴 D.C에서 살림을 차려야 했다.

 

사례2

부부는 14년간 혼인 신고를 못한 채 동거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이웃을 불러서 마지막 소주 파티를 한 뒤 집에 불을 질렀다. 부부 중 한 명이 불에 타 숨지고 한 명은 살인방화 혐의로 경찰서에 갇혔다.

 

이 부부들은 왜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을까? 연사 김조광수 감독은 강연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일일이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그들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답변했다. 모두가 틀렸다. <사례1>의 답은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이 버지니아 주에서 위법이었기 때문에’이며 <사례2>는 ‘부부가 동성동본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은 1967년의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인종주의 정책이 폐지되면서 가능해졌다. 한국에서 동성동본 간의 금혼 규정은 1997년 헌법 재판소에서 이 조항이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은 후 2005년 개정된 민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지금에 와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아직 결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김조광수 감독은 지난해 5월 21일 서울서부지법에 동성 간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

 

10월 8일 2015 고려대학교 인권축제 ‘모다깃비’의 강연은 김조광수 감독의 강연으로 진행되었다. 축제의 두 번째 연사로 초대된 김조광수 감독의 강연 모토는 ‘사랑이 이긴다’였다. 아직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미비한 한국사회에서 그가 결혼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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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중인 김조광수 감독

 

 

나를 인정하기까지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호모가 뭐에요?”라는 질문에 엄마도, 양호 선생님도, 상담사도 “그것은 몹쓸 병이야”라는 대답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종교에 귀의해보기도 했다. 신에게 제발 이 더러운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다.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좋아하는 스스로를 혐오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운동권 계열에 가담했다. 5.18 광주 비디오를 본 후 전대협(전국대학생협의회),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혁명을 꿈꿨다. 그러나 그가 접한 ‘세계 혁명사’에는 동성애자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욱 숨겨야 했다. 동성애를 고쳐보기 위해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그러다가 스웨덴으로 이민을 꿈꾸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었다. 스웨덴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게이(gay,즐거운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단체도 만들고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사회 운동’과 ‘동성애’는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하나의 ‘운동’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동성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몹쓸 병’도 ‘더러운 죄’도 아니었다.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할 기회를 찾은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를 향해 인정해달라고 나에게 얘기했었는데 나는 나를 스스로 인정한 적이 없었어요.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일이 어려웠던 거죠.” 자신을 인정하고 나서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언젠가 사회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것, 또 하나는 공개적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동성애자로 긍정하는 순간, 동성애를 긍정하는 다른 사람과 꼭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결혼할 권리는 인간 평등의 문제

 

그의 꿈을 인정해 준 단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김 감독과 레인보우 팩토리 김승환 대표는 지난 2013년 9월 결혼식을 올렸다. 주변인들조차 이 공개적인 결혼식에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왜 ‘결혼’이라는 이성애자들의 낡은 제도에 편입되려고 하느냐?’ 그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였다.

 

“저는 우리의 결혼이 이성애자의 제도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 중심의 결혼 제도를 뒤흔들 수 있다고 믿었어요.” 적어도 한국에서는 동성애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결혼도 ‘평등’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동성애 결혼을 남의 나라 일만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는 하나의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 ‘정말 한국에서 동성은 결혼을 할 수 없을까?’ 그는 고민을 던지고 함께 이 문제를 풀어나가려 했다.

 

결혼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가 결혼한 사람이 남성이었기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던 일이 그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다. 추석 등 명절에는 누구의 집에 먼저 가야 하는지. 어머니가 그를 ‘며느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사위’라고 불러야 하는지. 하지만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바람은 외로움 속에 살도록 남겨지지 않는 것, 우리 사회의 가장 오래된 제도 중 하나로부터 배제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동등한 존엄성을 요구한다. 헌법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리를 인정한다.

미국 연방법원 판결문

 

미국 연방법원의 판결문처럼, 김조광수 감독에게 결혼은 소수자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인권 운동의 하나였으며 그들의 사랑과 존엄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지난 6월 연방법원의 판결로 미국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지만 약 일주일 후 7월 6일 한국에서는 동성혼 혼인신고 관련 첫 재판이 열렸다. 이번 재판의 선고가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지금 법원은 그들을 합법적인 부부로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그들의 결혼이 인정받기까지 38년이라는 시간이 걸릴까 봐 그는 걱정스럽다고 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 김 감독은 언젠가는 그들이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 듯했다. 벌써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며 앞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더욱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을까.

 

 

 

메인이미지 : ⓒ 연합뉴스

 글/사진. 베르다드(qwerty925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