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제가 화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등장하는 주인공 제제를 가지고 노래를 쓴 아이유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아이유는 아동성애를 부추긴다부터 시작해서, 이전부터 로리타 컨셉을 가지고 로리타 컨셉을 조장해왔다는 비판의 목소리들이다. 결국 논란이 거세지자 아이유는 사과문을 발표했으나, 어떤 사람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곡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분명히 주제가 ‘아동성애’가 된다면 그 문제는 조용할 수 없다. 그것이 다른 것을 떠나서 5살 짜리에게 ‘섹시하다’란 발언을 했다면 말이다. 문제는, 그 비판 자체가 아니다. 비판의 내용이다.

 

 

가장 먼저, “아이유는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노래를 만든 것 같다”라는 지적이다. 그런데 잠깐. “책을 제대로 읽었다”라는 건 무엇일까? 작가가 ‘이렇게 책을 읽어야 제대로 읽은 겁니다’라고 정해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작가가 그렇게 지정해주었더라고 해도 그건 작가의 바람이지 독자에게 강요할 바는 아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가 어린이가 학대당하는 현실을 고발한 이야기인 것이랑 어떤 독자가 그것을 자신의 맘대로 읽는 거랑은 별개의 문제이며, 전혀 문제 삼을 수 없는 영역이다. 문학은 독자의 읽기 나름이지 누군가가 “제대로” 혹은 “옳다”라고 기준이 들어갈 영역이 존재하는 분야가 아니다. 아이유는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누군가는 제대로 읽었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소설마저도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어린이의 학대를 다룬 소설이므로 그 시선으로만 읽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세상인 셈이다. 어떻게 읽건 그것은 독자의 자유며, 그걸 떠들어대는 것도 독자의 자유다. 역사의 해석도 자유라고 하는 데 왜 소설은 기준을 가지고 읽어야 할까?

 

 

사진작가 에오네스코는, 자신의 딸 에바의 나체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자신 딸을 매춘부로 만들었다”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자극적이게. 에오네스코처럼 미성년의 나체를 찍은 사진작가들은 더러 있었다. 그 중에서 누군가는 FBI에게 아동포르노 제작자라고 잡혀가기도 했다(나중에 풀려났다). 그들의 작품이 소아성애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지적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예술활동을 하는 것에서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존중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예술활동의 결과로 욕을 먹거나 법적 제재를 먹는 건 창작 그 이후의 일이다. 즉 법을 어기지 않은 해석은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예술활동의 결과인 노래는 비판받을 수 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아이유가 라임오렌지나무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노래를 쓰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그 노래가 비판의 대상이라고 스스로 판단할 정도라면 비판하는 것은 맞다. ‘소아성애를 불러 일으킬 위험이 있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놈이…’라던지, 출판사에서 공식 성명을 내놓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책이나 여타 예술작품은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해석을 두고 그 해석이 어떤 위험을 지녔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왜 해석을 그렇게 하지?’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특히 누구보다도 독자의 읽을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출판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출판사는 어떤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다.

 

 

이를테면 자유경제원에서는 최인훈의 ‘광장’을 우리나라를 부정하는 소설이므로 삭제해야 하며,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우리나라의 위대한 경제발전을 무시했기에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했다. 자유경제원에 속한 이들이 그렇게 그 책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 다만 그 비판은 “네 해석이 틀렸기 때문이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이유의 노래는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고, 단순한 개인의 예술활동이다.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문제는 없지만 “기준”을 세워서 비판하는 일은 위험하다. 누차 말했지만 독서와 그 해석에는 기준이 없다. 그 누구도 아이유에게 “너는 책을 잘못 해석했어”라면서 반대로 책 해석에 대한 옳은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 ‘올바른 교과서’ 다음은 ‘올바른 책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난 아이유 팬이다. 동시에 아이유의 이번 앨범 노래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그럼 누군가는 되물을지도 모른다. ‘이번 앨범 듣지도 않았으면서 네가 무슨 팬이냐’고. 그렇다면 어떤 가수에 대한 팬의 기준은 있을까? 노래를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럼 얼마나 들어야 하는가? 아이유가 직접적으로 ‘이러이러한 사람은 나의 팬입니다’라고 인정이라도 한 적은 없다. 즉, 팬의 기준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어떤 연예인이나 선수 등에게 호감을 가져 ‘나는 팬이다’라고 한순간 그/그녀는 팬이다. 다른 이들이 그보고 “팬이 아니네”라고 할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이지 ‘정답’은 아니다.  ‘내 생각에 넌 팬이 아니야’는 가능하지만 ‘넌 이러이러한 기준에 충족하지 않으니까 팬이 아니야’는 틀렸다. 기준을 세우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제제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들이 A를 보고 A라고 생각할 거라고 판단하는 것과 A라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라는 건 굉장히 교만하고도 자기중심적인 소리에 불과하다. 아이유의 노래가 ‘소아성애를 부추긴다’라는 건 가능한 비판이지만 해석 자체에 기준을 가지고 오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예술은 다른 해석을 통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미술시간에 소변기를 샘이라고 해석한 뒤샹이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배웠다.  그 누구도 예술행위나 개개인의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을 제재해서는 안 된다. 내가 A라고 볼 때 상대가 B라고 보고, 다른 누군가는 Z로 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결과다. 그 Z가 무엇이 됐든. 결론적으로 아이유에 대한 비판은 “자 아이유야. 너의 해석은 존중하지만(물론 내 생각하고도 다르지만) 그 해석은 이런 위험이 있어”라는 게 옳다. 

 

 

결국 우리 사회의 논의는 ‘소아성애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컨텐츠는 금지되어야 하는가?’로 나아가야지, ‘아이유가 책을 제대로 읽었네, 안 읽었네’ 따위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전자로 치면 ‘소아성애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금지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아이유씨,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며 제제를 아이유와 마찬가지로 자신 뜻대로 ‘규정’하는 건 개인의 예술행위와 표현행위를 ‘제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표현의 자유를 ‘기준’으로 억압하지 말자. 그냥 “네 표현은 이런 점에서 문제라고 생각해”라고 말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통해 나온 표현이 문제라면 비판해도 좋다. 다만 “니 맘대로 말하지마!”라고 하지 말고, “니 맘대로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 말은 이런 면에서 문제가 있고,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라고 이야기해라.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해석의 기준을 어기고 말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위험이 있어서”가 맞다. 또한 그 책임은 비판을 하는 이도,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제제는 그냥 제제일 뿐이고, 그 제제를 규정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위는 ‘제재’다.

 

 

메인이미지 : ⓒ 아이유 미니앨범 ‘챗셔’

 

글. 감언이설(gchhg20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