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바로 ‘흙자식’입니다!

 

아버지는 회사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늘 장시간 노동과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고 버거워하셨다. ‘지금은 나라 경제가 안 좋아 힘들지만 조금만 더 참고 버티면 된다’며 철들지 않은 아들에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그냥 씩 웃고 말았다. 그건 이 흙수저의 생존 게임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알 수 있었다. 경쟁의 시작선이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한 것임을.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 흙수저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물려준 ‘흙수저’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건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스스로와 부모를 평가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흙수저도 모자라서 [흙자식]이란다.

 

11월 2일 온라인 커뮤니티 인스티즈에 ‘수저론에 대응하는 금자식, 은자식, 흙자식’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게시물에 따르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해서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고 효도하는 자식은 ‘금자식’, 자랑할 만한 명문대를 나오거나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자식은 ‘은자식’, 부모에게 의존하여 게임이나 하거나 노는 자식은 ‘흙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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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니투데이

 

뭔 흙자식이야, 이 개자식아

 

흙자식은 구조에 대한 비웃음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언어다.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다른 수저로의 계층 이동은 힘들어지고 혹은 영원히 흙수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흙수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흙수저는 부모의 재산에 따라 이뤄지는 부의 세습과 불공정한 경쟁을 공정한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자기책임의 논리를 자조하는 구조적 모순의 단어이다. 그런 단어에 대고 ‘너희들이 부모를 재산으로 평가하니, 한 번 당해보라’며 [흙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참 비겁하지 않나.

 

흙자식 프레임이 졸렬한 또 다른 이유는 수저 논쟁을 세대갈등으로 교묘하게 왜곡한다는 데 있다. 이건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흙자식’과 ‘흙수저를 물려준 부모’라고 싸우는 것을 보며 웃고 있을 사람들은 누구인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월세와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비용으로 이것저것 뜯기며 월 200만원 남짓한 돈을 손에 쥐는 아버지와, 시간 당 5580원이라는 싸구려 임금을 받으며 허덕이는 아들 사이에서 말이다. 이들에게 ‘부모 탓만 하지 말고 노력해서 효도할 생각을 하라’거나 ‘가난을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해보라’는 것만큼 모욕적인 말이 어디 있을까.

 

 

게임이 불공정하다니깐 노력 타령을 하네

 

11월 11일 페이스북 [자유주의] 페이지에 개인적 노력 없이 사회구조적 탓만 하는 ‘위선의 흙수저’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진짜 밑바닥에서 고생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환경에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흙수저 편에서 위선을 떤다는 것이다. 하지만 흙수저는 앞서 설명했다시피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단어이다. 거기에 대고 너희는 진짜 가난하지도 않으면서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꼴이라니, 가뜩이나 힘든 사람들한테 자꾸 힘 빠지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누군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청년들이 앉아서 구조 탓만 하며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 또한 우습다. 체제에 순응하고, 모순에 적응하며, 그 사이에서 생존방식을 고민해야만 구조에 대한 비판의 자격이 생기는 것인가?

 

헬조선 생존 게임 참가자들이 ‘그 과정이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노력은 해봤냐고 오히려 큰소리친다. 그러면서 당신이 불만을 제기할 정도로 남들보다 힘든 사람인지를 증명해보란다. 하긴 그러니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청년들이 뭐만 잘못되면 국가 탓, 정부 탓, 사회 탓을 한다”는 소리 따위를 해대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수저 논쟁을 단순히 ‘무능력한 아버지’와 ‘남 탓만 하는 패륜적인 아들’의 싸움으로 만드는 것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흙수저, 헬조선이라며 낄낄대는 청년들 사이에서 필요한 논의는 “너희들도 흙자식이다!”라거나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하지 마라” 따위가 아닌 [어떻게 하면 공정한 게임을 유지할 것인가, 계층 이동이 가능한 사다리를 많이 놓을 것인가]처럼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논의다. 노력한만큼 성공을 보장받는 사회, 공정한 경쟁에 따른 불평등한 결과도 납득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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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킨 /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이은 ‘버티니깐 도자기’

노오력의 신화는 끝나지 않는다.

 

흙수저라는 계급의 단어를 곱씹으며 아버지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반복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속에서 사람들이 계급을 인식하게 된 이 은유의 단어가 세대갈등으로 왜곡될 만한 패륜적인 언어로 읽혀서는 안 된다.

 

 

글. 이주형(mangha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