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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노량] 노량진과 무속의 상관관계는?

노량진 세 글자에 수많은 단상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많은 이미지들이 곧 도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고시생’과 ‘수산시장’ 없는 노량진 이야기를 얼마나 들어보았는가? 그 많은 ‘고시생’과 ‘수산시장’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충분한가? 이제 고함20은 우리가 감각하지 못했던 ‘노량’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노량진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과거 노들이라는 이름에 가까웠던 이곳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이 근처 나루터를 노들나루라고 불렀다. 나름의 오래된 지역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지만 정작 지역의 민속적인 기록, 말 그대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다. 나루터가 있는 강가였던 만큼 노량진 일대는 사람이 살기에 괜찮은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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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흥, 노량진도, 지본담채, 12.5x17cm, 고려대박물관 소장

 

지금은 노량진에 무속인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노량진에 무속인들이 몰려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노량진풍류회’는 ‘조선 말기 서울 노량진에 있었던 무당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철종 재위 당시 무당의 수가 줄어들자 이들은 자체적으로 규칙을 정하고 폐습을 제거하는 등의 노력을 위해 이러한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량진풍류회는 왜 노량진에 생겼을까? 이는 정조 재위 당시 무속인들을 4대 성문 밖으로 쫓아냈던 정책이 큰 원인이라고 보인다. 이외에도 정우봉 선생님이 한국학보에 쓰셨던 것을 비롯해 유만공 선생님이 지은 “세시풍요” 등 몇 문헌에는 공통으로 노량진 부근에 무당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은 도성에 출입하면서 굿판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정조 시대의 문인 강이천은 노량진 무당에 대해 언급한 시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푸른 금삼에다 흰 수건 머리에 싸매고

새벽이면 노량진 남쪽에서 온다네

신통한 무어(誣語)에 눈물을 흘리나니

삼생의 원업(寃業)을 옛일처럼 안다네

 

이러한 노량진의 무당 마을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이규태 선생님이 쓴 “신태양사”라는 책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노량진은 무당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각종 공사 반대에 동원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들은 어떤 땅에 흐르는 맥이나 기운 등을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고, 시위의 한 방법으로서 굿을 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꽤 오래 무당 촌을 형성하고 지내면서, 이들은 기존 서울의 마을굿과는 다른 양상의 제례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들제’라고 불리는 형태다. 성 내부에 살 수 없었던 이들은 각자 흩어져 지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서로 교류가 힘들어지는 과정에서 각자만의 형식과 절차를 굳혀가게 된 것이다. 노들제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대문 근처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괜찮은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강가라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6918-02신윤복, 굿(신들려 춤추는 무녀), 혜원전신첩, 28.2×35.2cm, 간송미술관 소장

 

본디 서울 내 마을굿은 용산구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이어졌다. 서울 내에서 확인된 마을 신앙의 지표수가 가장 많은 곳이 용산구이며, 무당이 주재하는 마을굿만 해도 8개가 된다. 상업적, 경제적 기반이 잘 마련된 곳이기 때문에 용산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신앙의 지표가 용산구 다음으로 많은 것은 영등포구다. 두 군데 모두 노량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노량진에 무당이 모여 살았던 것도 비교적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한강 근처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제당을 ‘부군당’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서빙고동부군당이 있다. 서울 내에는 20여 개의 부군당이 있는데, 모두 한강을 중심으로 영등포구, 용산구, 마포구, 성동구 등지에 있다. 이러한 부군당은 서해안 일대와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서해안의 마을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도 추측된다. 하지만 부군당에서 지내는 제의의 날짜가 저마다 다르므로 서해안보다 관청의 영향을 더욱 받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부군당은 노량진에도 하나가 있었다. 동작구 자료에 따르면 노량진 부군당은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데, 영본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1925년 장마가 있었을 때 이촌동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당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1960년 전후로 사라졌다.

 

46918-032012년 노들제 행사 중 자리걷이 / ⓒ뉴시스

하지만 한양 굿 중 하나인 노들제만큼은 비교적 최근까지 유지되고는 했다.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2012년 10월에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통 노들제 굿을 재현하기도 했다. 전통 노들제 굿은 남대문 밖에서 가장 유명한 굿이었다고 하며, 도성에 출입하였던 자들이 모여 지냈고 또 강변에 있던 만큼 널리 퍼지며 유명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지금은 개화기의 흔적마저 찾을 수 없는, 지극히 현대화된 공간이지만 노량진에도 과거는 존재했고, 역사 속 과거 이전에 사람이 살던 과거가 존재했다. 그 중심에는 무속이 꽤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경제와 자본의 변화, 환경에 변화에 따라 무당이 위치하는 곳도 바뀌었고, 서울이라는 공간의 범위가 달라지면서도 무속에도 변화가 있었다. 한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존재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안타깝다. 그렇다고 노량진에 다시 무속의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거나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블럭(blucsha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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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도 역사입니다.

1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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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현

    2015년 12월 4일 16:51

    무속신앙이 왜 흑역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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