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내 주변에선 찾을 수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치는 일상이며, 일상 역시 정치입니다. 우리는 몇 번을 열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러시아의 민속 인형 마트료시카가, 일상을 파고들 때마다 마주치는 정치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단상들을 정치와 연결짓는 [마트료시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익명의 게시글은 SNS에 넘쳐난다. 이들 중 대부분은 글의 제재로 삼은 대상을 향해 혐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마침 올해 6월엔 퀴어 퍼레이드가 있었고 당시의 혐오 대상은 퀴어였다.

 

“항문 섹스하는 거 솔직히 역겹지 않아요?”
“솔직히 그 사람들 옷 벗고 그러는 거 역겨워요”

 

퀴어 퍼레이드 이후 접속한 SNS에는 예의 혐오 게시글이 가득했다. 그 글을 하나하나 읽어내릴 때마다 퍼레이드 동안 달아올랐던 내 즐거움은 차게 식었다. 대열에 참가해 퍼레이드를 즐기기도 했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며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나다. 나는 그들의 혐오 표현을 견디지 못했고 이기면 본전, 지면 손해인 ‘키배’에 자연스레 참전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퀴어 혐오 게시글 키배에 참전했던 나는 지극한 감정소모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편으론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 그들이 퀴어에 대한 혐오를 어떤 논리로 정당화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였고, 그 논리가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전제를 내포하는지를 스스로 학습할 수 있었던 게 두 번째였다.

 

그런데 다른 논리들과는 다르게 하나의 논리는 논박이 끝난 후에도 내 마음을 유난히 켕기게 했다.

 

“퀴어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인정하는 것과 소아성애, 수간을 인정하는 건 무슨 차이가 있나요?”

 

위 논리의 정합성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이 논리는 ‘퀴어’ 간의 성생활과 ‘소아’와 ‘성인’ 간의 성생활, ‘동물’과 ‘인간’ 간의 성생활을 동치 한다는 데에서 이미 그 전제가 틀려먹었다. 퀴어 간의 성생활은 동등한 주체 간의 성생활이지만 소아와 성인, 동물과 인간 간의 성생활은 현실적 권력 관계 상 두 대상이 동등한 주체가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다른 논박이 가능하겠지만 이 글의 핵심이 아니기에 쓰지 않는다.)

 

하지만 저 논리에 등장하는 ‘동물’이란 단어는 내게 다른 의문을 남겼다. ‘내가 과연 수간을 비판하기에 정당한 인물인가?’, 환언하자면 ‘내가 수간을 비판하기 위해 동물의 권리(이하 동물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나’가 그 의문이었다.

 

육식을 즐기는 동물권 옹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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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게 동물권을 옹호할 자격이 미달되어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내가 수간을 하는 인간보다 동물을 더욱 억압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난 ‘수간은 동물을 억압하는 행위입니다’란 이야기를 하며 끼니마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내심 아쉬워했고 맥주를 마실 때면 치킨을 떠올리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물을 강간하는 것과 자신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윤리적으로 그르다고 나는 단언할 수 없었다.

 

물론 단백질 및 기타 무기질 섭취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란 점에서 고기 섭취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조금의 비용과 정성을 더 들인다면 굳이 고기가 아니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단백질과 무기질을 섭취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비용과 정성을 들이는 게 귀찮아서, 그리고 내 입이 행복해지길 바라며 고기를 즐겨왔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동물들은 무고하게 도축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대에는 가장 윤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도축 과정을 전문 도살자에게 전가한다. 이 과정은 내 앞의 고깃덩이가 과거에는 하나의 생명체였다는 윤리적 의식마저도 소멸시킨다. 나는 내가 먹고 있는 고기가 한때는 나처럼 살아있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애써 외면해왔었다. 그리곤 내 입맛을 위해 도살된 존재의 살을 은밀한 배덕감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육식 거부, 동물권을 이야기하기 위한 공약의 부담

 

이러한 관념이 내 머릿속을 점차 채우기 시작하자 난 육식을 거부하게 되었다. 덧붙여 육식과 채식이 갖는 의미에 대한 공부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공장식 사육의 문제점’, ‘육식으로부터의 젠더 문제’ 등 육식이 가져오는 악영향들에 대해서도 차차 배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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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결국 지금은 돼지, 소, 닭을 도살해 만든 고기와 육가공품을 먹지 않는다. 단 완전히 풀만 먹는 비건은 아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게 될 일이 많다 보니 달걀과 우유, 그리고 가끔 생선을 먹는 페스코 베지터리언이다. 현실적인 타협 지점이다. 여건이 된다면 육식을 거부하려는 취지에 맞도록 좀 더 비건에 가까워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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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의 단계 ⓒ월간식당

 

육식 거부이자 채식을 진행한 지는 3개월이 돼간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채식을 안 하는 자신은 윤리적으로 그른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몇몇도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해 나는 비채식주의자가 윤리적으로 그르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밝히고 싶다. 개인마다 식이에 대한 윤리적 가치관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의 가치관을 대부분 존중하기 때문이다.

 

너 혼자 노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고, 완벽히 공감하진 못했지만 채식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는 사람 역시 주변에 하나둘 늘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채식을 하는 사실이 주변인들 사이에 공공연해지면서 채식은 나 혼자 하지만 채식에 대한 의의와 결과는 내 평소 행위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 지금 이 알량한 글도 공유의 일환이다. 혹시 아는가? 내 평소 모습과 이 글로 인해 채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지. 종전의 페미니스트 선언 이후 육식 거부 선언을 통해 내가 지켜야 할 공약은 또 하나 늘었다. 공약이 늘어남은 내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늘어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 부담과 비례해 육식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길 바라본다.

 

글. 콘파냐(gomgman3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