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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당신’과 혐오 사회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키워드는 혐오였다. 이전에도 혐오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맹목적이고 공공연한 적대감 표현이 있었나. 이 영화는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혐오의 시대에 대한 긴급한 요청이다.”

 

이영 감독이 서울독립영화제 GV(감독과의 대화)에서 영화 <불온한 당신>의 제작을 두고 한 말이다. 3년간의 준비 끝에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 <불온한 당신>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불온세력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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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불온한 당신>

 

‘불온세력’으로 낙인찍히는 사회적 약자

 

<불온한 당신>은 1945년생 레즈비언 ‘바지씨’의 이야기로 시작해 성소수자 인권 선언에 반대하는 집회를 비추고, 일본의 커밍아웃 커플의 이야기를 했다가 세월호 집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퀴어 축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돌아와 끝이 난다. 

 

영화의 흐름이 두서없이 보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혐오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유기적이게 연결되어 있다. 성소수자 운동과 세월호 집회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혐오 세력은 성소수자를 ‘종북게이’로, 세월호 유족을 ‘불온세력’으로 치부한다. “저들이 저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한민국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함이다. 나라를 어지럽혀 망하게 하려는 거다”는 말은 사회적 약자들의 저항에 빨간 낙인을 찍고, 순식간에 그들을 ‘혐오 받아 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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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혐오의 민낯은 추악하다. 동성애 혐오 세력은 성소수자들의 면전에 대고 에이즈 확산의 주범이라고, 치료가 시급한 정신병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게다가 그들은 교묘하다. 자신들을 ‘동성애 운동 단체’라고 칭하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한다.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에서는 “이제 그만 좀 하라. 나라가 어디까지 더 책임져야 하나”고 물어놓고, 퀴어 축제 앞에서는 “아직 세월호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는데 무슨 축제냐”고 비난한다.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각종 명분을 이용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들을 대상화한다. 영화는 그 추악하고 교묘한 모습을 낱낱이 담아낸다. 

 

<불온한 당신> 속 혐오는 적나라한 우리의 현실이다. 약자들이 목소리 내는 것에 불온세력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 그래서 그들의 입을 막고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현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서다. 너네(약자)는 계속 가만히 있고 그냥 지금처럼 살자는 것이다. 약자를 향한 혐오는 공공연하게 조장되고, 강자에 의한 약자혐오 선동은 쉽게 이루어진다. 약자와 연대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도 빨간 딱지가 붙는다.  

 

그 결과, 우리는 혐오가 만연한 시대를 살아간다. 영화 속에 가시화된 혐오 세력처럼 피켓을 들고 확성기에 대고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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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감추는 삶과 불안한 삶, 그리고 약자의 생존

 

약자에게 혐오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참다 참다 터져 나온 약자들의 목소리는 “우리도 살고 싶다”는 외침이다. 영화는 선배 레즈비언 이묵과 일본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통해 약자의 생존을 말한다. 

 

‘바지씨’ 이묵은 평생을 남성처럼 꾸미고 산다. “여자끼리 연애한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는 성별의 경계를 초월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론 남장하는 여성으로, 때론 남성으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삶에 익숙하다. 한편, 논과 텐은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커밍아웃을 결심한다. 부부관계를 맺지 않으면 재난의 상황에서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린다. 논과 텐은 “이해받기 위한 커밍아웃이 아닌 우리가 살기 위한 커밍아웃”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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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약자의 삶을 앞에 두고 불온하거나 불온하지 않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허하다. 그들의 투쟁은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한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 보장은 성소수자가 남들처럼 살기 위해 필요하며, 세월호 진상 규명은 남은 자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살기 위한 투쟁은 그만둘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지금은 혼란이 가득한 과도기다. ‘바지씨’ 이묵이 말한 것처럼 그래도 (그가 젊었을 적에 비해) 요즘 세상은 많이 좋아졌다. 성소수자를 향한 폭압적인 혐오의 가시화는, 그 이전에 성소수자가 가시화되었기에 가능하다. 아예 제 존재조차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에 비하면 분명히 한 걸음 나아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혐오 사회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선동하는 자, 선동에 동조하는 자, 침묵하는 자에 의해 굴러간다. 가만히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영 감독은 “모든 사람이 혐오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혐오현상의 기록자로써 역할을 다했다. 이제 이영이 묻는다. 관객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글. 달래(sunmin5320@naver.com)

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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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게 살겠다

1 Comment
  1. Avatar
    독자

    2015년 12월 11일 15:15

    이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모르겠다. 예시로 시작해서 비슷한 맥락의 사례 열거로 끝나는데, 이 글은 현실이 이렇습니다 라고 끝나지 그 어떤 주장도 함의도 유추하기 어려워 보이며, 하다못해 그럼 그 현실을 이야기하는 이유조차 없다. 이 글의 주제는 “우리는 혐오가 만연한 시대를 살아간다” 이게 전부인건가? 보다 명확하게 글을 다듬을 필요가 있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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