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빠르지 않다. 빠른 것은 시간뿐이다. 시간은 빠르지만 세월은 느려서 그날 이후로 600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세월은 여전히 바닷속에 있다. 그 안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사람이 있다. 팽목항은 그들을 기다리는 가장 가까운 육지다. 참사가 발생한 지 599일이던 12월 5일, 인적 드문 작은 항구에서 정적인 풍경을 메우는 작고 낮은 소리들을 보았다. 팽목항의 시간들을 들었다.

 

 

소리 하나. 목포터미널의 애국가

 

5일 오전 4시 40분 첫새벽, 전남 목포시 목포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목포에서 진도로 가는 첫 버스는 6시 15분. 텔레비전이 놓인 ‘고객대기실’에서 핸드폰을 충전하며 첫차를 기다렸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서 텔레비전은 선명한 화면과 함께 애국가를 들려주었다. 나는 내려오기 전날 서울에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를 봤다. 그런 내게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자는 애국가 가사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나라가 구조하지 못한 국민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들어야 했다.

 

 

47376-1

진도읍에서 팽목항으로 가는 버스

 

진도터미널에서 팽목항으로 가기 위해서 또 한 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의 탑승객은 총 6명. 고함20 기자 3명을 제외한 승객 3명의 행선지는 팽목항이 아니었다. 진도대로를 달리며 항구로 향하는 50여 분 동안 몇 명이 더 버스에 탔지만, 그들 역시 팽목항이 아닌 곳에서 내렸다. 창밖의 풍경 역시 예사로웠다. ‘팽목 2km’라는 표지판을 지나서야 세월호를 잊지 않고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내용의 노란색 현수막을 길에서 볼 수 있었다.

 

 

소리 둘. 까치와 풍경(風磬)

 

버스는 팽목항 바로 앞에 정차했다. 팽목에 도착했다는 안내는 없었지만, 버스 안에서도 빨간 등대와 등대에 붙은 커다란 노란 리본이 선명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내릴 수 있었다. 팽목항을 마주하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고요하다’였다. 일행을 제외하고선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고 하차하자마자 보인 팽목항 매표소 역시 한산했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간간이 까치 우는 소리만 들렸다.

 

 

47376-2

 

바닷가를 따라 달려온 버스는 다시 바닷가를 따라 난 도로로 떠났다. 버스가 섰던 매표소 앞 공터는 팽목항의 상징과 같은 빨간 등대로 가는 길로 통했다. 그 길의 오른편에는 현수막이 가득 걸려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고창석, 양승진,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의 얼굴과 이름이 담긴 것부터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걸어둔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 내용은 다양하지만 색깔만은 똑같이 노랬다. 길의 왼쪽에는 리본 모양의 구조물과 기다림의 의자를 시작으로 노란 리본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리본 아래는 손바닥만 한 타일들로 이루어진 기억의 벽이었는데, 각기 다른 글과 그림이 역시나 똑같은 노란색 위에 쓰여 있었다.

 

등대로 가는 길에 올라서자 까치 우는 소리는 줄어들고 풍경(風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풍경은 빽빽한 노란 리본들 사이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고, 소리는 등대에 가까워질수록 커졌다. 몇몇 풍경에 함께 달린 ‘희망으로 오소서’라는 문구가 적힌 쪽지는, 무심코 지나친다면 글자가 적혀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글자가 희미해져 있었다.

 

 

소리 셋. 들리는 건 오직 발소리와 물소리

 

일행을 내려준 버스가 떠난 해안도로 쪽으로 2분 정도 걸으니 자갈이 깔린 공터에 가건물 10여 개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각각에는 ‘안산시 상황실’, ‘단원고 상황실’, ‘가족 휴게실’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움직일 때면 내가 자갈을 밟는 소리만이, 사진을 찍느라 멈춰 설 때면 바닷물의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47376-3

팽목항에 마련된 분향소

 

건물들 뒤에는 ‘세월호 팽목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다. 분향소에 들어서자 참사로 희생된 295명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새삼 ‘참 지독하게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자, 책, 인형 등 분향소를 찾은 사람들이 두고 간 선물들도 눈에 들어왔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9명의 실종자의 경우, 사진 대신 생전 지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간단한 메시지가 사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방명록을 쓰는데 바로 그 전날(12월 4일) 분향소를 다녀간 사람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도 내가 느끼는 적막 속에서 희생자들의 얼굴을 마주했겠구나, 생각했다.

 

 

소리 넷. “그들은 우리와 같이 봄꽃을 볼 수가 없네요”

 

도착한 지 1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만나지 못해 걱정하던 찰나, 측면에 전남대학교 광고가 크게 붙은 대형 버스가 팽목항에 멈춰 섰다. 버스에서는 40여 명의 사람이 내렸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교사들이 단체로 팽목항을 찾은 것이었다. 준비해온 현수막을 달던 백성균 교사는 “세월호는 단원고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님에게 가슴 아픈 일”이라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실종자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주로 관광으로 가던) 워크숍 대신 오게 되었다”고 했다.

 

47376-4

묵념 후 시를 낭독 중인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교사들

 

교사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등대 앞에서 묵념한 후 이해인 수녀의 시 <슬픈 고백>을 낭독했다. ‘아아 오늘은 4월 16일 / 진달래와 개나리 / 벚꽃과 제비꽃은 / 저마다의 자리에서 곱게 꽃문을 여는데 / 그들은 우리와 같이 봄꽃을 볼 수가 없네요’ 두 명의 교사가 천천히 시를 읽는 동안 일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세월은 아직 그곳에 있다

 

팽목항에 머문 3시간 동안 본 것은 이게 거의 전부다. 바다는 조용했고 팽목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수많은 노란 리본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기만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으므로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세월호냐고 물을 것이다. 발길이 뜸해진 팽목항의 풍경처럼 세월호도 이미 끝난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요한 팽목항,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닷속의 배 한 척. 거기에 아직 사람이 있다. 그래서 아직 세월호다. 여전히 ‘아직’이어야만 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600일이 넘도록 멈춰선 ‘세월’이, 팽목에 있다.

 

 

글/사진. 아레오(areoj@daum.net)

[아직, 세월호] 기획. 릴리슈슈, 아레오, 압생트, 풍뎅이, 콘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