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성별에 맞는 역할을 강요 받을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 사회문화 시간에서는 ‘역할 기대’라는 개념으로 그러한 강요를 접했다. 지위에 맞는 역할이 있고, 그러한 역할에 맞게 행동한다는 ‘기대’와 역할 간의 ‘갈등’ 등의 형태가 사회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대 초반을 넘기고 나서야 이러한 역할 개념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가 개인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은 어쩐지 상상력이 부족하다. 태어났을 때의 정체성도 바뀔 수 있고,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답함은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정규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가 준 사고 안에 갇힌 채 역할을 강요하게 되고, 답답함을 만드는 방식은 더욱 견고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성별’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2010년 TEDWomen에서 한 교육자이자 활동가 토니 포터(Tony Porter)의 강연은 ‘맨박스(manbox)’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남자다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토니 포터(Tony Porter)의 강연. 잠깐 시간을 내어 보시길 권한다.

 

토니 포터는 “남자란 터프하고, 강인해야 하며, 배짱이 있어야 하고, 우월해야 하고, 분노 외에는 고통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두려움은 당연히 없어야만 한다고 배웠습니다. (중략)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며,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고, 또 여자는 하등하고 남자의 소유물이자 관심의 대상인데, 특히 성적인 대상이라고 배웠습니다” 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맨박스’라는 남성의 집단 사회화가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어떠한 문제점으로 이어지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설명한다. 강연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별에 따른 역할을 강요하는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재생산되고 주입된다. 특히 ‘남성성’에 관한 문제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조금 심각하게 느껴진다.

 

토니 포터가 이야기한 경험은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맨박스’는 한국 곳곳에 있다. 남자는 자존심이 세다는 소리,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소리 등 남자다움에 대한 강요와 발언은 곳곳에 존재한다. 한국의 래퍼 제리케이가 최근 발표한 “You’re Not A Man”은 앞서 말한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풀어냈다. 그는 1절에서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들었던 이야기, ‘계집애 같다’는 말의 문제점을 끌어낸다. 이후 2절에서는 위 강연에서도 나왔던, 남자가 여자를 성적 대상 혹은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특히 2절의 이야기는 군대를 포함한 남성 중심 집단에서 ‘성경험’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분위기,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분위기 등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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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케이의 신곡 “You’re Not A Man” 커버

 

곡은 몇 가지 스테레오타입 혹은 흔히 있는 사례를 가사로 풀어내며 남자다움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맨박스’라는 것이 얼마나 갇혀 있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인지를 경험을 통해 풀어내며, 이를 랩이라는 방식을 통해 전달했다. 이 곡은 몇 년 전 그가 기존에 발표했던 “You’re Not a Lady”의 다른 버전이다. 곡은 보다 주체적인 여성이 되자는 문제의식을 담고자 했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표현이나 ‘남성에게 의존하는 여성’을 그려내는 데 있어 고민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제리케이는 앞서 발표한 곡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반성하고 사과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전작에 일부 포함된 여성차별적 요소에 대해 논의하고 사과한 바 있기도 하다. 이 곡은 어떻게 보면 고민과 반성의 결과인 셈이다.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그러한 신화적 면모에 갇혀 행동하다 보면 행동과 삶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그러한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 제약조차 제약인지 모를 때가 있다. 또한 ‘남성성’에서 벗어나라고 하면 ‘새로운 남성성’을 그려낸다거나 ‘여성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등 또 다른 이분법에 갇혀 ‘맨박스’ 안에서 겉도는 사람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떻게’를 자신이 직접 상상하고 디자인하며, 자신이 상상한 정체성을 현실로 옮기자는 것이다. 그것이 ‘나답게’ 사는 것이고 개인이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쪽이지 않을까 싶다.

 

 

글. 블럭(blucsha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