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내 주변에선 찾을 수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치는 일상이며, 일상 역시 정치입니다. 우리는 몇 번을 열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러시아의 민속 인형 마트료시카가, 일상을 파고들 때마다 마주치는 정치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단상들을 정치와 연결짓는 [마트료시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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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연대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며칠 전 국정교과서 문제로 집회에 참가한 고등학생을 보며 우리 아버지가 한 말씀이다. 비슷한 얘길 8년 전 고등학생 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때는 2008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국내 정치의 최대 관심사였다. 수십만 국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수입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모습이 독선적으로 보였기에 나도 광화문 집회에 참여해 볼 예정이었다. 뉴스를 보고 계시는 부모님께 말했다 “저 이번 주말에 광화문 집회 한 번 가볼게요.” 돌아온 대답은 곱지 않았다. “어린 게 무슨 집회야. 공부나 해.”

 

당시 있었던 일이 잘 기억나진 않는다. 단지 저 짧은 대화와 부모님 얼굴에 비친 경멸과 무시, 그 위에 얹힌 약간의 걱정 정도만 기억난다. 당시 부모님 말씀이 내 인생의 제1원칙이었던 만큼 학생이 저런 데 가면 안 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너무 물렀다. 난 부모님의 말씀에 맞서 아래와 같이 대응해야 했다.

 

01. “당신은 뭘 아나?”

 

어른이 학생의 정치 참여를 막는 가장 큰 이유는 “어린놈이 뭘 알아?”라는 말에 담긴 편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럼 우리도 물어나 보자. “당신은 뭘 아나?”

 

매일 뉴스만 보는 우리 아버지도 정치에 대한 모든 걸 알지 못 한다.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정치 전반에 대해 모든 걸 이해할 수 없다. 기껏해야 뉴스에 나오는 정도만 알 뿐이다. 정치 전반에 대해 모든 걸 이해할 수 없다면 정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어차피 잘 모르니 난 가만히 있자’와 ‘어차피 잘 모르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자.’

 

두 선택지는 서술어만 다른 게 아니다. 전자는 다분히 수동적인 만큼 정치에 대한 지식 획득에도 수동적이다. 또한 국민 눈치 안 보는, 견제 없는 정부와 의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흔히 중립을 이야기하는 사람 중 전자에 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에 대한 전반적·포괄적 이해 없이 중립을 운운하는 건 사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방임을 중립이란 단어로 포장한 것이다.

 

학생은 ‘잘 모르니’ 정치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방임을 학생에게 심어주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학생이 잘 모를 것이란 생각도 일종의 편견이며, 자신이 정치적 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다. 어차피 정치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지금 내가 알고 있고, 옳다고 여기는 영역 내에서만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정치 행위를 하는 게 가장 합리적 선택이다. 

 

02. 경험은 참고사항이지 만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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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봐서 아는데..” ⓒ YTN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일단 어른이 하라는 대로 해라.” 경험적으로 우위에 선 성인이 학생의 입을 다물 게 하는 고정 멘트 중 하나다. 물론 성인의 축적된 경험이 정치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지극히 사적일 때가 많고, 사적인 만큼이나 편협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정치를 포함한 어느 분야에서든 경험이란 참고사항 정도의 역할이지 만능의 역할이 아니다.

 

경험의 총량이 정치 참여에서 우선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18세, 25세, 45세, 70세가 겪은 경험의 총량이 다르더라도 그들의 정치 참여는 모두 동등한 가치로 존중받아야 한다. 45세란 이유로 18세와 25세의 정치적 의견을 무시한다면 그 45세 역시 70세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의 주장을 수용하더라도 학생의 정치에 대한 권리는 여전하다. 특히 학생 관련 안건에서는 현재 당사자성을 가진 학생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성인이 말하는 학교·학생·학업에 대한 경험은 현재 학생 집단이 가진 경험보다 시기적으로 낡았으며 양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03. 학생의 본업 따질 거면 당신도 평생 당신 일만 해라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공부나 해라.” 역시나 많이 들어 본 ‘본업론’이다. 개인의 판단에 따라 학생의 본업이 공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업이 공부라고 해서 정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본업론을 거꾸로 성인에게 돌리면 직장이 있는 성인 역시 정치를 멀리하고 본업인 직장 일만 해야 한다.

 

본업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삶에서 정치를 분리한다면 정치는 정치를 업으로 삼은 정치인만 해야 한다. 정치인에게만 정치를 위임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다.

 

04. 학생의 정치를 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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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별 선거권·피선거권 부여 연령 [자료 출처] 중앙선거 관리위원회

 

물론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연령대 학생의 정치 행위는 학생 개인과 사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또한 정치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교육 역시 선행되어야 한다. 공식적인 정치 참여에 있어 어느 정도의 나이 제한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정신적 성숙의 척도를 ‘합리성’에 둔다면 정신적 성숙은 10대 후반이면 충분히 성인 수준에 다다른다*.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교육도 정규교육과정을 밟았다면 충분하다. 성인 수준의 합리성과 기본 지식을 갖춘 10대 청소년이 단지 학생이라는 이유로 정치 참여에 제한을 받을 이유는 없다. 실제로 몇몇 국가에서는 10대의 참정권을 보장하기도 한다.

 

*참고: 최윤진, 「청소년 권리 제한 논리의 부당성에 대한 고찰」

 

글 전반에 걸쳐 ‘학생’과 ‘성인’ 등의 표현을 쓰며 연령대별 계층을 구분했다. 하지만 이는 학생의 정치를 이야기하기 위한 임의적 구분에 불과하다. 당사자성과 비례성, 대표성 등을 제외하면 정치 행위에서 학생과 성인 등의 계층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두 계층의 정치 행위는 같은 가치를 지닌다. 학생과 성인의 정치적 발화의 무게를 연령을 기준으로 가늠하는 건 실상 꼰대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학생에게도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자유와 권리가 있다. 정치 행위의 주체가 학생이라는 이유로 학생을 억압하지 말아 달라.

 

글. 콘파냐(gomgman3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