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유감 시즌4] 그동안 고함20은 기성언론을 향한 비판의 날을 계속해서 세워왔다. 새 언론유감 연재를 통해 한 주간 언론에서 쏟아진, 왜곡된 정보와 편견 등을 담고 있는 기사를 파헤치고 지적하려 한다. ‘기레기’라는 조롱이 흔해진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비판을 자조로 끝내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제한 없이 어떤 기사든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미디어펜] 자살한 서울대생, 부자 부모 찾는 연대생…흙수저의 남 탓
이루어질 수 없는 지상천국…모자란 부분에 집중하면 스스로 불행해져(링크)

 

“자살을 택한 서울대생이나 부자 부모를 찾는 연대생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원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다. 죽을 때까지 고단한 삶이다. 그리고 한 가지 진실이 더 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겪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견딜 만하다. 살 만 하다.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더라도 지나고 나면 자신의 밑거름이 되곤 한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때를 추억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것이다. 다음에 어떤 초콜릿을 집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사 인용)

 

47798-5

 “엄마가 그랬죠. 인생은 초콜릿 통과 같다고. 다음에 어떤 맛이 나올지 모르니까요” ⓒ 포레스트 검프

 

포레스트 검프는, 결과적으론 잘 살았다. 이 기사에 인용된 대사처럼 가끔은 씁쓸한 순간도 있었지만,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 인생은 초콜렛 통에 비유될 수 있는 ‘단쓴’이 있다. 별로 달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해서 그 통 전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드물다. 초콜렛은 기본적으로 맛있는 음식이니 말이다.

 

얼핏 죽음은 그것으로 ‘상황 종료’인 듯 보인다. 특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 그것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들여다보는 데에 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누군가의 자살은 사회적으로는 계속 해석해야 할 숙제와도 같다. 이것이 벼랑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선택이자 메시지라는 사실을 거부하면, ‘젊은이의 참을성 없는 모습 중 하나’로 축소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기사에는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몰이해가 드러난다. 서울대생 A씨에게 자살이 어떤 의미였는지 인정하려는 태도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릿 통’ 비유를 인용한 것은 ‘단어를 거꾸로 말해봐요! 삶의 의지가 생겨요!’ 수준의, 자살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사는 A씨가 수저계급’론’에 회의를 느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유서를 읽어보면 수저계급이 실재한다는 현실에 무력을 느낀 것에 가깝다. 수저계급이라는 단어가 없었을 때도 사람들은 계층을 구분 짓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년층에서도 자신의 계급을 인식하는 동시에 자살충동을 겪었던 이들이 존재한다. 젊은이의 자살은 예방을 위한 연구와 관찰 대상이 되기 이전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젊음을 등졌기 때문에, 젊음은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마냥 가볍고 화창한 것이기 때문에, 자살은 그냥 특별한 일 정도일 뿐 애초에 사색의 주제조차 되지 못했다.

 

초콜릿은 맛이라도 있지

 47798-4

소설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는 인생을 ‘비스킷 통’에 비유한다 ⓒ 상실의 시대

 

문장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통’과 미도리의 ‘비스킷 통’ 모두 인생은 원하는 것만 선택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두 문장이 완전무결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지는 않는다. 모든 이에게 적용하기도 힘들다. 인생에서의 ‘단맛이 덜한’ 순간은, 실제로는 맛없는 것을 넘어 뱉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간식이 든 통 이론은 이런 간극도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와 소설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지어진 이 문장들을 현실에서 조언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이유다. 맛있는 간식이 많은 이 통을 거부한다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해당 기사의 시각에서, 서울대생 A씨는 ‘다음 초콜릿’을 얻을 정도의 인내심이 부족했다. 또 높은 등록금을 비판한 연대생도 참을성 없는 20대일 뿐이다. 무작정 문학의 문장을 가져다 쓰는 순간 그것은 어떤 삶도 담아내지 못할 만큼 밋밋해졌다. 그냥 좀 맛없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 순간에 집착한 이들일 뿐이라고 글쓴이는 말한다. 이런 시각은 급기야 자살을 마음대로 결론짓는 오만한 태도로 발전한다.

 

“일부의 뒤틀린 심사가 흙수저 헬조선 증후군을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어지는 누군가의 자살은 안타깝지만 거기서 끝이다. 이는 개인과 사회, 선택의 자유, 책임과 삶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치환된다.” (기사 인용)

 

“자살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심리적으로 떠밀려서 벌어지는 일’. 사회적으로 노력하면 줄일 수 있다.” (일본 내각부의 자살대책위원회)

 

A씨는 자신의 유서를 널리 퍼뜨려달라고 말했다. 마지막 글에서 그는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독이 되는 말과 행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기사 인용구의 ‘누군가의 자살은 안타깝지만 거기서 끝이다’라는 주장은, 이 설명으로 반박할 수 있다. A씨는 ‘남은 사람들’의 세상이 변화하기를 바랐다. 칼럼은 기사 안의 청년들을 무책임한 이들로 모욕하고 있지만, 자살이라는 목적이 달성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 중 하나는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없으면 자살은 성립할 수 없다.

 

글을 쓴 김규태씨는 ‘부모는 어차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니 ‘모자란 부분에 집중하지 말라’고 말했다. 원래 ‘지상천국’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A씨가 바라던 세상이 모든 것이 완벽한 천국이었을까? 부모 이외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이 칼럼에서 그렇게 찬양하던 것, 바로 ‘인생’이다. 누구도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못했다. 또한 모든 사람의 초콜릿통이 달콤할 것이라는 전제를 버려라.

 

 

참고

EBS 다큐프라임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2009 [사회조사(인터넷조사)를 통해 본 청년 자살충동에 관한 연구]
임경은, 통계개발원 조사연구실 (2010년 2월 접수, 2010년 5월 채택)

대표이미지. ⓒBettys

글. 블루프린트 (41halftim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