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2012년이다. 2012 년의 나는 20살이었다. 서툴렀고, 부족했다. 2016년에 24살을 맞은 내가 보기엔 그렇다. 때로 그 시절의 글을 읽는 일이 있다. 읽고 있자면, 말 그대로 ‘오그라든다.’ ‘그때는 뭐라고 이런 말을 썼을까’라며 후회하고 당장에라도 지워버리고 싶다.

 

  ‘알못’이면 닥쳐야 하는 세상

 

으레 ‘똑똑하신’ 분들이 이야기하는 ‘무시무시한 엄포’에 따르면 2012년의 나는 절필을 선언해야지 싶다. 모르면 닥쳐야 한다. ‘멍청이’들은 닥쳐야 한다. ‘알못’들은 닥쳐야 한다. 24살의 나라고 해서 얼마나 달라졌겠느냐마는, 20살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멍청’했고 더 ‘알못’이었다. 더 몰랐다. 그랬기에, ‘보지도 않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들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의하면 난 정말 닥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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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포이 19년째 묵언수행 중이랍니다.. ⓒ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멍청이’는 함부로 의견을 내서도 안 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도 말을 할 때마다 자격을 검증받아야 한다. 세월호 피해자의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나 ‘좋은 아빠’인지를 전 국민 앞에서 검증해야 한다. 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오면 ‘너희들이 뭘 안다고. 가서 공부나 해라’라며 무시하는 세상이다. 지방대 학생이 문제를 지적하면 ‘지잡대 생이 무슨. 고등학생 때 공부 좀 하지 그랬냐’라고 깔아뭉갠다. 말만 하면 ‘아는 것 좀 많으신 분들’이 ‘얼마큼 아냐’고 묻고, ‘말할 만큼 노력했느냐’고 묻는다.

 

백 번 물러서서, ‘좋은 아빠’나 ‘연륜과 지식이 있는 어른들이’, 혹은 ‘명문대생들이’ 더 똑똑하거나 더 잘 알 거나 아니면 어떠한 노력으로 ‘자격’을 획득했기에 그들의 말은 더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취향 쪽은 어떤가? 누군가가 어떤 힙합 가수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힙합도 모르는 게’라거나, 혹은 누군가가 어떠한 음식을 맛이 없다고 여기는 이유만으로 ‘맛도 모르는 놈’이라고 무시하고 깔아뭉개진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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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이’가 떠들 자유는 있다. 그리고 그 멍청이에게 뭐라고 할 자유 역시 있다”고들 이야기 하신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멍청이가 떠드는 말은 무가치하고 똑똑한 사람(그러니까, 닥치라고 하는 당신)이 떠드는 말은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틀렸다. 멍청이에게 뭐라 하는 발언은 멍청이의 발언과 동등한 지위여야 하는데 우리가 만나는 건 으레 ‘깔아뭉개는’ 발언이다. 하지만, 고민해보자. 남을 멍청이라 하는 당신은 멍청이가 아닌가? 멍청이의 기준은 무엇인가? 멍청이라고 해서 그 발언이 가치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자유가 멍청이의 자유보다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많이 안다고 해서 남보고 닥치라 할 권리는 없다

 

나는 긴 시간 해리포터의 팬이었다. 몇 년간 해리포터 시리즈의 한국판 서적 총 23권을 각각 수십 번씩 읽었다. 손꼽히는 규모와 유명세를 가진 해리포터 팬 카페에서 몇 년간 운영진이었고, 다음 편의 내용을 맞추기도 했으며 나중에 롤링이 설명한 부분을 미리 분석하기도 했다. 해리포터 영화가 국내에서 개봉하면 시사회에 초청을 받아 개봉 며칠 전에 이미 영화를 봤으며, 지상파 방송에서 해리포터 관련 아이템을 찍을 때 부르기도 했다. 자, 그러면 나는 더 이상 해리포터에 관련해서 ‘멍청이’가 아닌 걸까? 나는 내가 있던 카페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멍청한 놈들아 그게 아니니까 좀 알기 전까진 닥쳐라’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그런 나 역시 멍청이에 불과하며, 멍청이는 닥쳐야 한다면 나 역시 닥쳐야 한다. 유일하게 멍청이가 아닌 사람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인 조앤 롤링 정도만 남을 것이다. ‘더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더 모르는 주제에 떠드는 것’ 역시 죄가 아니다. ‘더 모르는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운운하며 ‘닥치’라는 건 ‘자격’이라는 실체도 없는 허상에 눈이 멀어서 행하는 폭력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의 쉬운 질문에도 귀를 기울이는 세계 석학의 행동이 더 ‘옳은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모르면 닥쳐라’는 폭력이다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발언이 필요하고, 유의미할 때가 있다. 때론 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다. 강의가 그렇고, 언론사의 발언이 그렇고, 정치인과 같은 공인의 발언이 그럴 것이다. 언론사나 정치인과 같은 이들은 ‘편향되거나 틀린 발언’을 하지 않아야 하며, 그랬을 경우 충분히 비난받을 만하다. 남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지식을 파는 사람들 역시 ‘더 맞는 말’을 해야 한다. 그 외에도 ‘권위자’의 발언이 필요한 순간은 많다. 허나 우리는 그렇지 않은 순간에도, 단순히 맛을 논하고 좋고 싫음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너는 모르니까 닥쳐야 한다’며 남들의 입을 닫는다.

 

그것은 모든 이들을 ‘더 아는 사람’과 ‘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는 계급화의 출발이며 새로운 발언과 생각을 막는다. 우리가 지방대생이나 전문대생, 고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건 그들이 말할 줄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자격을 요구하며 ‘닥치라’고 해서는 아닌가? 총 12년의 초중고를 거치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공부를 못하면 조용히라도 해라’라는 으름장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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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닥치고 질문하지마’의 결과. 오바마 대통령의 G20 정상회담 연설 당시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직접 발언권을 줬음에도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 EBS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 캡처

 

‘모르면 닥쳐라’, ‘알지도 못하면서 발언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어디 감히’와 같은 말들은 한 사람의 발언에 대한 합당한 비판이 아니라 ‘폭력’이다. 어떤 이의 발언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내용을 반박하는 것이 ‘비판’이다. ‘읽어보지도 않았으면 입을 다물어라’, ‘해보지 않았으면 가만히 있어라’, ‘알지도 못하면 조용히 있어라’ 같은 말들은 다른 이를 ‘멍청한 사람’으로 계급화하고, 다른 이의 발언을 ‘제한’하려고 하는 행위지 비판이 아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하는 ‘알지도 못하면서 조용히 해라’라는 발언 역시 당신보다 뛰어난 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신 역시 그런 발언을 하기 전에 ‘닥쳐야’ 한다. 당신이 그 부분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 정도면 아는 거다’라고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인가? 애초에 그런 권한을 지정할 사람이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남보고 ‘닥치라’는 입을 마찬가지로 ‘닥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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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고 닥치라는 너나 닥치세요 ⓒ MBC <무한도전> 캡처 

 

모두가 떠들기에 나아지는 세상

 

2012년의 내가 쓴 글은 서투르고 모자라다. 멍청한 이야기도 많다. 2016년의 나도 그럴 테지만, 2012년의 나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2012년의 나에게 ‘닥치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부족한 발언일지라도 그 발언은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지한 발언일지라도 끊임없는 발화를 통해 그 발언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고, 부족한 발언들 사이에서 더 나은 발언들이 지속적으로 나오면서 사회에는 더 나은 논의와 주장들이 생겨날 것이다. 12년의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나보다 더 똑똑한 누군가도 더 똑똑한 누군가에 의해 글을 쓰지 않을 것이고, 결국 제일 똑똑한 한 사람만 글을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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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돈 같은 ‘라디오 알못’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배철수 ⓒ MBC <무한도전> 캡처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존 밀턴은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논쟁하도록 하라. 누가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진리의 논박은 허위를 억제하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라고 했다. 허위와 틀린 말들 속에서 진리는 더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들이 공인이나 정치인, 언론인과 같은 ‘말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떠드는 행위에 무조건 닥치라고 하지 마라. 누군가의 발언이 틀리면 틀린 걸 지적하고 맞는 발언을 해주면 된다. 그것이 남을 아래로 깔고 ‘나는 잘난 놈이야’라는 자위에서 그치는 것 대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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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기에 멍청한 말이 나오면 그만큼 맞는 말을 해주면 된다.  이 진리를 꿰뚫고 있던(?) 본프레레 감독 ⓒ KBS 화면 캡처

 

사회에서 필요한 건 가장 똑똑한 1인의 발언이 아니라 부족한 이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수많은 발화다. 그 발화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부족한 발언들은 점점 더 나아진다. 부디, 2012년의 내가 닥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2016년의 나도. 나처럼 ‘멍청한’ 수많은 사람들도. 무지해도 말할 수 있다. 무지하면 비판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닥쳐야’ 할 이유는 아니다.

 

 

글. 감언이설(gchhg20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