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이슈팀의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텍스트를 소개하려합니다. 공부합시다!

 

주 소비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주류 문화콘텐츠는 그 내용에서는 항상 ‘이성애-남성’의 지배영역이었다. 주목할 만한 반항적(혹은 도발적) 콘텐츠들이야 물론 있었다만. 그런 ‘예외’들은 주류를 벗어난 변방(혹은 비주류)의 영역에 고고히 존재해왔다. 와중에 중심 영역에서 ‘비 이성애’나 ‘비 남성’적인 변방의 존재들은 여전히 주류의 시각으로 소비되거나 멸시받았다. 지독한 변방의 딜레마다.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 최근의 문화적 트렌드가 이 딜레마에 대한 극복의 움직임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콘텐츠 속에서 여전히 견고한 중심의 위상을 볼 때 그것은 여러모로 미지수다. 여전히 힙합 음원의 가사엔 여성혐오가 판을 치고, 영화계 누구누구는 여배우의 덕목 따위를 입에 올린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어느 면면에선 지금껏 허용되지 않던 새로운 캐릭터, 혹은 새로운 이야기가 대중에 밀착한 채 태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청년연구소에선 청년세대 주류문화 중 하나인 웹툰의 몇 작품을 통해 중심에서 태어나는 ‘비주류’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그것은 사실 전폭적인 혁명은 아니다. 대중을 최대한 끌어안으려는 그들의 움직임은 저항보단 오히려 잔류를 꿈꾼다. 하여 말하자면 그건 대중의 트렌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 하나의 생존법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가능성은 살아남는 자에게 있다.

 

치즈 인 더 트랩(순끼, 네이버), 홍설의 영리한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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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끼, 치즈 인 더 트랩

 

캠퍼스 내 권력관계와 남주인공 유정의 미스터리를 이용한 <치즈 인 더 트랩>의 일명 ‘로맨스릴러’는 엄밀히 말해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재벌 2세(유정)와 사고뭉치 캐릭터(백인호)는 전형적인 드라마 설정인 데다, 사건의 막바지마다 그들이 구원자 남성으로서 등장하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주인공 홍설을 둘러싼 여러 현실조건이 그녀에게 관계상의 능동성을 부여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동생과 자신에 대한 부모님의 태도 차이로 느끼는 가족 내 성차별, 영원한 악역 김상철 등과 벌이는 대학 내 권력게임, 더불어 속을 알 수 없는 유정과의 밀고 당김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홍설 자신의 자존심까지, 홍설이 겪는 모든 스트레스는 적어도 그녀를 이야기의 주인공에 자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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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아서”야말로 홍설의 최대 장점이다 ⓒ 순끼

 

큰 틀에서 기존의 한계란 한계는 모두 떠안고 있음에도 <치즈 인 더 트랩>이 꽤나 성공적인 차별화를 이루어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지금껏 여러 여주인공을 이야기 속 남성의 소비재로 전락시켜온 저 흉흉한 설정들 속에서 홍설은 지극히 영리한 방식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어느 정도 사수하고 있다.

 

‘캠퍼스 히어로’ 유정의 개입이 사건을 종식할지라도, 언제나 단락을 끝내는 나래이션은 홍설의 자기평가니까. 수많은 사건을 통과해가는 홍설의 생존기는 그 자체로도 나름 문화계 여주인공 생존의 표상이다.

 

카페 드 쇼콜라(재아/SE, 네이버) 남자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

 

<치즈 인 더 트랩>이 정상 연애 판타지라는 큰 틀 속에서 홍설 개인의 (나름의) 발버둥을 보여준다면, <카페 드 쇼콜라>는 주류 욕망에 대한 거의 전방위적인 파괴를 감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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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고 잘생긴 두 ‘또라이’ ⓒ 재아/SE 

 

돈 많고 잘생긴 ‘또라이’들(시현과 몽룡)이 주인공 박유나와 함께 엮인 전작(프린스의 왕자)의 삼각관계는 근친애, 퀴어, 여성향 등 발칙한 소재들을 두루뭉술하게 엮어놓은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전작에서 깔아놓은 이 도발적 소재들은 새 등장인물 춘향의 개입으로 더욱 본격적인 국면을 맞는다.

 

어리고 잘 생긴 “남자를 탐하”며 “남자는 서른부터 쓰레기”를 중얼대는 춘향의 욕망은 통쾌한 미러링을 연상시킨다. 시현에게 치마를 입혀보는 것이 지상과제인 그녀의 욕망은 결코 ‘주류’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코미디적인 트렌드를 통해 대중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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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거리낌없이 ‘어린 남자’를 좋아하자! ⓒ 재아/SE 

 

“잘 생기고 어리고 돈 많고 치마가 잘 어울리는 남자”를 찾아 헤매는 모험이라니. 그야말로 발칙한 취향이 ‘병맛’을 빌미 삼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의 안팎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린다. 그 앞에서 이성애-남성중심이라는 견고한 주류 욕망도 폭소와 함께 무너질 수밖에.

 

물론 춘향은 페미니즘의 전사가 아니고, 몽룡과 시현 사이 숨은 보이즈 러브도 퀴어 인권운동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지극히 상업주의적인 소비문화의 선두주자들이다. 그에 따라 자칫 보호돼야 할 가치를 조롱이나 쉬운 소비의 대상으로 전도시킬 위험 또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다분히 대중 친화적인 그들의 생존방식은 문화 속 욕망의 지배자였던 남성 캐릭터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노골적인 미러링이 마침내 그들을 ‘대상화’의 자리로 끌어내린 것이다. 때문에 분명하게도 이것은 ‘남자’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썸남(배철완, 네이버), 방향 없는 무차별 삼각관계

 

퀴어 코드는 이제 주류 문화콘텐츠 속에서도 공격적인 혐오의 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어지거나, 외려 전폭적인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조롱이라는 또 다른 혐오의 갈래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를 두고 오락문화의 발전이라면 발전이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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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철완, 두 <썸남>의 이야기

 

<썸남>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는 그중에서도 발군으로 보인다. 외모도 성격도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흔한 한국 남자’ 규태와 기제는 우연한 계기로 동거를 시작하며 어색함 속에서도 우정을 쌓아나간다. 평범한 남자 대 남자의 관계가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는 점이 썸남이 가진 최대 매력이다.

 

동성 간 관계의 찌질한 모습을 비추는 방식이 특별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썸’이라는 관계로 코믹하게 풀어내는 작업은 분명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더군다나 규태와 기제는 자신들의 경험을 남성 중심적으로 미화하여 재편하지도 않을뿐더러, 본의 아닌 ‘썸’을 전폭적인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도 않는다.

 

작품 내에서 둘 간의 브로맨스는 철저히 ‘인간 대 인간’의 훈훈한 경험으로만 제시된다. 외려 규태는 게이 캐릭터인 원형의 사랑을 응원하면서도 그의 실수를 지적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당연하게 제시되는 캐릭터의 ‘편견 없음’으로 작품은 퀴어 소재를 이용한 코미디가 자칫 간과할 수 있는 폭력적 시선을 방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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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자들은 가운데가 빠졌으면 한다고 한다 ⓒ 배철완

 

하여 회마다 거듭되는 독자들의 ‘게이 드립’도 그만큼 거부감을 덜어낸 모습이다. 규태, 기제, 그리고 여성 캐릭터 민아 간의 삼각관계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그야말로 누가 이어질지 모를 방향 없는 무차별 삼각관계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두 남자의 ‘편견 없는’ 찌질함과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 민아가 이루는 삼각형 속에서 남성 중심 콘텐츠 변방에 대한 포비아는 효과적으로 자취를 감춘다.

 

생존, 남자를 파괴하는 새로운 방식

 

아직도 넓은 의미에서 문화콘텐츠는 남성 중심적이다. 드라마 판에 비일비재한 ‘나쁜 남자’ 신화만 봐도 그렇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성은 이미 주 소비층이 누구인지를 떠나 모든 판타지 속에 남성 판타지를 아로새겨놓았다.

 

퀴어를 다각도에서 폭력적으로 소비하는 이성애 중심주의도 마찬가지다. 성욕의 화신처럼 그려지는 우스꽝스러운 게이 캐릭터들이 무의식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심어놓는 건 오래된 일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밖에 다룰 수 없는 ‘변방의 남자들’이었다.

 

결국 문제는 중심에 선 남자다. 새로운 시도들과 점진적인 의식의 변화 속에서도 문화의 방향은 언제나 대국적으로 그들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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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뭐야?” “남자!”

 

‘웹툰 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의 주류 문화에서 ‘비주류’의 이야기가 싹트는 현상이 진정한 의미로 호재일지, 말했듯이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홍설도, 춘향도, 규태와 기제도, 힘없이 사장되거나 기존의 방향에 편승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어느 정도 타협의 과정을 거친 작품들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그들은 이미 대중의 문화 속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있다. 각자의 한계와 타협을 유지한 채 어떻게든 살아남고는 있다. 하여 그들은 타협하면서도 그 중심으로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 휘젓고는 있다. 그들의 위태한 생존은, 그래서 중심에 선 남자를 파괴하는 새로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글. 인디피그(dbsrjstls@naver.com)

메인 이미지. 네이버 웹툰 <카페 드 쇼콜라>(재아/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