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소녀’를 전면에 부각한 예고편을 보고 우려했다. 그 우려는 현실로 스크린 위에서 재현되었지만, 그럼에도 ‘귀향’을 긍정하기로 했다.

 

놀라운 것일 수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여러 사람이 영화 ‘귀향’을 접하고 반응하는 방식들은 말이다. 상영관 늘리기 운동이 있었고, 참상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영화 관람 운동 또한 불었다. ‘귀향’의 상영관을 늘리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지자체장들이 등장했고, 어느 역사 교사는 다섯 관을 통째로 빌려 단체 관람을 주관했다.

 

많은 이들의 눈이 ‘위안부’로 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복제문 수준의 합의문을 ‘불가역적’으로 규정한 지난 12·28 합의 덕분에, ‘위안부’ 문제는 쟁점화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했다. 이 지점에서 영화 ‘귀향’의 존재가 감사하다. 대중의 관심 역시 지난 합의로 어려움을 겪는 ‘위안부’ 운동에 유효하다.

 

허나, 이와 같은 흥행과 동시에 영화는 ‘위안부’에 대한 가장 익숙한 문법들을 반복했다는 점에 한계를 지닌다. 더불어 이 문제를 ‘이제 종료된 아픈 역사’로 볼 것인가, ‘아직 진행 중인 문제’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피하고 있다. 피해자들을 향한 폭력의 재현이 ‘1930년’이라는 식민지하의 특수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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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향’

 

귀향은 ‘폭력의 재현’을 택했고, 그 주체로 ‘괴물 같은 일본군’을 보여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오직 눈의 초점만이 빛을 발하는 나체의 일본군은 사람보단 괴물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가부장제 아래에, ‘식민상황’이라는 특수성은 모두 희석되어야 한다는 말로 ‘제국의 위안부’의 논지를 전달하는 건 아니다. 전시 상황에 성노예를 동원함이 오직 ‘괴물’에 의해서 자행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물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특수한’ 괴물의 행위에 한정되어서 안 되고, 가부장제와 성 억압이라는 ‘보편상황’과 함께 다뤄져야 한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피해자들의 모습은 ‘할머니’와 ‘소녀’로 이분 된다. 그 사이의 기억은 생략되고, 영화는 이를 다루지 않는다. 식민지 해방 후 포스트모던 국가를 세우던 국가재건기, ‘민족의 딸’을 지키지 못한 ‘피식민지 남성들의 거세된 남성성’을 외면해야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철저히 묵인됐다. 피해자 故 김학순의 증언 이전까지 반세기 동안 ‘위안부’ 문제는 숨겨져야 했다. 무성적인 존재 ‘할머니’가 되어서야 이 문제는 발화될 수 있었다.

 

영화 속 피해자들의 ‘회복’ 또한 법과 제도, 정책이 아닌 ‘굿’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존재한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운동은 민족주의에 점유되어 왔다”라 말하며, 몇몇 진보 지식인의 얇은 갈증을 해소했던 지점들이 여기 있지 않을까 한다. 이를 위해 ‘’귀향’은 곧 ‘위안부’ 운동의 양태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한다. 허나, 박유하는 틀렸고, 영화 ‘귀향’의 재현 방식보다 ‘위안부’ 운동은 이미 몇 걸음을 앞서있다.

 

‘귀향’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피해자이자 ‘위안부’ 운동의 주체들이 ‘민족주의’에 소환되고 이용되는 ‘할머니’일 때에만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은 성립 가능해진다. 그러나 ‘위안부’ 운동은 지난 20년 동안 수 없는 변곡점을 지났다. 이를 통해 위안부 운동은 초국적 ‘전시 여성인권 운동’이 되었고, 나비기금은 ‘아프리카외 세계의 전시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인권운동’을 위해 함께 쓰인다. 박유하가 지적한 ‘한국인의 동조’ 또한 이미 수년 전부터 학계에서 지적되어왔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자 ‘위안부’문제에 영화가 지닌 논의 수준이 1991년이라면, 오늘의 운동은 2015년의 것으로 승화됐다. ‘귀향’의 이와 같은 흥행은 여전히 대중에게 ‘위안부’에 대한 의식이 과거에 익숙함을 의미한다. 주류미디어가 ‘위안부’를 재현해온 문법을 영화 ‘귀향’도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관람함 자체가 이 문제의 논의 수준을 발전시키는 방편이 될 수 없다. 제목 ‘귀향’은 ‘위안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1991년의 것으로 ‘귀환’함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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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28 합의 이후 있었던 긴급토론회

 

‘귀향’을 향한 대중의 호응은 정부가 ‘최종적’이라는 12·28 합의 이후에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는 중요하며. 문제화되고 쟁점화될 필요가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귀향’을 긍정한다. 허나, 남은 이야기들이 있다. 영화 ‘귀향’이 생략한 지점들 역시, ‘귀향’이 담아낸 지점만큼 중요하다. 영화의 재현에 대한 비판적 고민이 있어야 한다. 영화가 재현하는 모습은 ‘이제는 과거가 돼버린 슬픈 역사’가 아닌 ‘현실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영화가 생략한 질문들과, 또 답습한 문법에 관해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귀향이다. 피해당사자이자 운동주체들의 수준으로 논의를 돌려놓는 귀향. 논의가 찾아야 할 ‘고향’은 ‘귀향’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미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 있고, 우리는 익숙한 문법들의 ‘고향’ 바깥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아야 한다.

 

 글. 압생트(9fif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