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JOY. 흥을 깨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여성혐오와 반성평등적 컨텐츠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 흥을 깨지 않으면 계속해서 번식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KILLJOY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단 한 번도 성평등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킬-조이] 연재를 통해 마음껏 고함20이 느낀 불편함을 말하고 설치며 흥을 깰 예정이다.

 

두 개의 삶이 있다.
주로 ‘하며’ 살아온 쪽과 주로 ‘당하며’ 살아온 쪽.

 

성적 대상화  Sexual objectification

: 타인의 주체성을 배제한 채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는 시각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 (the viewing of people solely as de-personalised objects of desire instead of as individuals with complex personalities and desires/plans of their own.)

 

성적 대상화를 당하는 건 주로 여성이다. 남성도 성적 대상화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자주, 더 일상적으로, 더 익숙하게 대상이 된다. 가부장제 사회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두 성(sex)에게 다른 몫의 젠더권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 사회는 성 경험과 관련하여 남성을 능동적인(하는) 존재로, 여성을 수동적인(당하는) 존재로 그린다. 성적 행위가 남성 입장인 ‘삽입’으로 상징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가부장제에서 사회화된 여성과 남성은 성별 권력 구도를 학습한다. 게다가 남녀의 물리적인 힘의 차이와 권력 구도가 맞물려 실제적인 성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이 겪는 대상화는 더 위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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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로렌 웨이드와 홀리 이글슨이 패러디한 광고. 웨이드는 “광고 사진을 남성의 얼굴과 몸으로 포토샵함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부도덕한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TakePart

 

‘하는’ 삶을 살아온 이가 ‘당하는’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성과 감성 모두의 면에서 그렇다. 이성은 머리로 차별을 이해하고, 감성은 차별당하는 이들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나마 이성으로 이해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그 이해마저도 없는 남성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여성과의 관계에서 주체로 존재하는 건 오직 자신일 뿐. 타인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익숙하다. 대상이 된 타인이 느낄 감정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성적 대상화가 극단에 달하면 성폭행이 된다.

 

# 건국대 OT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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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페이지 ‘건국대학교 대나무숲’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일어난 일이다. ‘펠라치오’(남성 성기에 하는 오럴 섹스)와 같은 단어를 몸으로 설명하는 게임을 했다. 술자리에서는 여자 신입생들을 한데 두고, 남학생들이 돌아가며 들어와 수위 높은 스킨십을 동반한 벌칙을 수행했다. ‘하는’ 이는 즐겁고 ‘당하는’ 이는 괴롭다. 그러나 여학생들이 느낀 “장난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이나 “정말 싫다”는 감정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동의 없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고 농락하는 과정에서 고려되는 건 오직 ‘일부’만의 즐거움이다.

 

대학 OT 시즌 때마다 성희롱 논란이 끊이질 않고 터진다. 이쯤 되면 병이다. 논란 이후의 변명이나 사과문도 다들 비슷하다. ‘재미를 위해서’ 그랬다고들 한다. 누구만을 위한 재미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건 반쪽짜리 재미다. 대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직장에서, 미디어에서 흔히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전제된다.

 

# 수요미식회 ‘막국수’ 편 (3월 2일 자)

 

상대의 인격을 짓밟지 않아도 대상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칭찬’도 성적 대상화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2일 <수요미식회> 속 이현우의 발언을 이를 잘 보여준다. 음식의 데코레이션을 칭찬하며 이현우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쪽 찐 머리의 비녀 꽂은 듯한 그런 형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음식의 ‘아름다움’을 단아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비유한 것이다. 사물에 대해 감탄할 때 여성이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건 둘 다 ‘보여지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보는 주체는 남성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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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수요미식회’

 

“범했어요.”

‘단아한 여성’처럼 아름다운 막국수를 먹는 것에 ‘범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강간을 연상하는 단어가 발화되고 방송된 것이다. 이는 또한 실존하는 여성이 없어도 여성의 성(sex)이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막국수 하나로도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회에 산다. 

 

반대로 여성과 잔 후에 남성들은 종종 ‘먹었다’는 표현을 한다. 막국수를 ‘범하고’ 여성을 ‘먹는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대우받지 못하고, 사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 셈이다. 실제의 잠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관계없이 여성은 남성의 입을 거쳐 남성의 시각에서만 소비된다. 그들에게 보여지는 여성은 보는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다. 여성의 발화에서 남성이 그와 같이 소비되는 일은 드물다.

 

성적 대상화라는 비판에 대한 반응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로 요약된다. 반성이 아닌 변명이다.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가해자들은 계속 의도를 운운하며 비판을 피하려 든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구냐”는 말은 “네가 기분 나빠도 나는 계속 너를 성적 대상화할 것이다”는 뜻으로 들린다. 변명에서조차 주체는 오직 ‘나(남성)’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려되어야 하는 건 ‘당하는’ 사람들이다. 이성을 발휘하건 감성을 발휘하건, 대상으로 전락한 처지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적어도 당한 자의 반발이 ‘유난’으로 취급되진 않는 사회여야 하니 말이다. 누군가는 집밖에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돌아오는 하루 새, 몇 번이고 타의로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누군가가 소수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꽤 많이, 생각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글. 달래.(sunmin53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