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배우 류준열이 일베 논란에 휩싸였다. SNS에 게시한 컨셉 사진이 문제가 됐다. 절벽 등반 사진에 덧붙인 “두부 심부름 가는 중”이라는 멘트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일베의 ‘고인 드립’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류준열 측은 즉시 일베 의혹을 부인했지만 이미 ‘일베냐, 아니냐’는 논란은 류준열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일베’가 배우 류준열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됐다. 이후 일련의 해명과 함께 ‘일베가 아닌’ 증거도 속속 뒤따랐지만 류준열 일베설은 배우에게 뼈 아픈 경험으로 남았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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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사진. 그냥 컨셉 사진으로 볼 수도 있다 ⓒ 배우 류준열 인스타그램  

 

그런데 이 ‘류준열 일베설’이 보여준 건 단지 개인의 난처한 특수 상황만이 아니다. 외려 ‘일베’가 어떤 인물이나 현상, 혹은 언어의 검열 기준으로 작용하는 건 최근 들어 흔한 일이다. 일베 이용자들의 고인 드립, 혐오표현 등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며 ‘일베냐. 아니냐’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하나의 과제로 던져졌다. “000이 일베해?”라는 질문은 일상에서도 공적 무대에서도 익숙하게 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베는,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적 검열의 족쇄가 됐다. 영화 ‘친구’의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내는 것도, ‘너무’를 ‘노무’로 발음하는 것도, 별생각 없이 내뱉는 ‘두부 심부름’도 이제는 ‘일베냐, 아니냐’라는 피로한 검증 절차 위에 서야 한다. 일베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살풍경이다.

 

‘일베가 만든 세상’에서 개인은 끝없는 자기검열의 늪에 빠진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은 줄어들고, 타인의 언어에 대한 의심은 증폭된다. 그리고 그렇게 일베는 족쇄가 된다. 서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온라인상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철저한 검열을 수행하지 못한 ‘의심분자’들이 일베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선 평소 자신의 사상이나 생활을 타인에게 끝없이 제시해야 한다.

 

일베만 아니면 된다고?

 

그런데 이 ‘일베의 덫’은 오히려 몇 가지 아이러니를 탄생시킨다. 모두가 일베와 자신을 분리하려 부단히 노력한 결과 일베는 오히려 개인 도덕의 절대 원칙으로 자리 잡았고, 바로 그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떤 비도덕은 기이한 합리화의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즉, ‘일베가 돼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일베만 아니면 돼”라는 문장을 탄생시켰다.

 

개인은 모든 혐오의 온상을 일베라는 절대 악 속에 밀어 넣고 그것과 단절함으로써 그 자신은 혐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일베보다 미약하거나, 일베와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는, 혹은 일베가 아닌 사람이 발화하는 혐오는 언젠가부터 ‘일베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면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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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인증샷 포즈, 이것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 오마이뉴스/이희훈

 

나는 일베가 아니므로 여성혐오자가 아니고, 일베가 아니므로 지역감정에서도 자유로우며, 일베가 아니므로 고인 드립도 짓궂은 장난에 불과하다. 비도덕의 영역에 일베가 놓이자 반대로 도덕적 영역에 ‘비 일베’가 자리한 꼴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어느 단계에서 대중적 반발이라는 한계를 극복지 못한 현상도 이러한 심리와 관련이 없지 않다. 그들의 공격대상은 만연한 여성혐오 자체를 향해 있지만, 언어적 차원에서 일베라는 특수 형식이 부각되자 그들은 오히려 ‘여자 일베’라는 오명에 고립되고 말았다. “나 일베 아닌데?”라는 반문은 메갈리아의 공격에 대한 효과적인 차단막이 되었고 “너희 일베랑 똑같잖아”라는 반격은 미러링 전략에 대한 근본적 가치판단을 떠나 유효한 전략으로 작용했다.

 

일베와의 전쟁, 그 부작용

 

한편으로 “일베만 아니면 돼”는 “일베한다고 다 쓰레기냐?”라는 반격을 오히려 유효하게 만든다. 래퍼 블랙넛을 둘러싼 논란은 좋은 사례다. 명백한 여성, 약자 혐오 가사를 즐겨 쓴 블랙넛에 대한 비판이 ‘일베 이용자다’로 수렴되자 반대로 ‘래퍼가 일베라고 나쁜 랩이 아니다’라는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인디고블루’를 비롯해 그가 사용했던 가사들은 ‘일베냐, 아니냐’를 떠나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베에 대한 강박이 일베적 언어에 대한 비판을 오히려 무디게 만든 것이다. 사실 중요한 건 ‘일베냐, 아니냐’가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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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넛은 일베 이전에 음악 자체가 문제였다 ⓒ Mnet

 

‘만물일베설’을 비롯해 일베에 대한 심한 경기를 조롱하는 반응들 또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일베를 색출하고 그와 단절되려는 심한 강박은 때때로 반박과 조롱의 여지를 남기며, 오히려 일베와 상관없는 이들에 대해 적절치 못한 비난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도) 그리 효과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한 결과를 내어놓는다. 결국, 도덕을 추구하기 위한 것 같던 ‘일베 강박’이 비도덕적 반박과 비도덕에 대한 면책을 오히려 가능하게 만든다. 일베를 추방하려는 노력이 우리 안에 일베를 심어놓은 셈이다. 기이한 아이러니다.

 

해서 여전히 계속되는 이 지루한 일베와의 전쟁엔 패색이 짙다. ‘일베냐, 아니냐’는 족쇄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 인디피그(ghin2800@gmail.com)

편집. 오마이뉴스 박정훈, 인디피그

대표이미지 출처. 앳스타일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