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 여러 언론사에서는 ‘여성의 인권’과 더불어 ‘양.성.평.등.’에 관한 기사가 등장했다.

 

‘여성이 억압받고 있으니 양성을 평등하게 하자는 말은 문제가 없잖아?!’

 

아니다. ‘양성평등’이라는 수사의 공허함과 이것이 배제하는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단어가 내포하는 폭력성과 문제의 중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기만은 우연히 탄생하지 않았다. 양성평등은 문제의 핵심을 지우기 위한 ‘의도적인’ 정치적 언어다.

 

모든 폭력은 세상의 성은 오직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 아래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각자에게 다른 역할을 배분한다. 그 역할은 항상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내포하며 나머지 하나를 통제한다. 문명은 자연을, 이성은 감성을, 서양은 동양을, 그리고 그 시초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며 이 세계는 팽창해 왔다.

 

‘양성평등’이라는 구호는 여전히 ‘남성과 여성, 양성’이라는 이분법을 지니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구호가 문제의 핵심을 답습하는 아이러니다. 대체 무슨 효과를 지니길래 ‘양성평등’은 사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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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여성의날, 다수의 언론에서 ‘양성 평등’을 외쳤다

 


효과 1. ‘성 억압’이 사회적으로 조성되는 ‘권력관계’의 문제임은 생략한다

 

‘양성평등’과 같은 수사는 성 억압 문제를 단순 ‘생물학적 성차’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문제가 단순화되니 해결 또한 단순화된다. 표면으로 나타나는 ‘숫자’에 갇히기 십상이다. ‘양성평등’을 말하는 이들은 언제나 ‘여성’의 취업률만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역할과 희생엔 눈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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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수자 학생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철거되었다 ⓒ미디어오늘

 

효과 2. 양성평등은 성 소수자의 존재를 가린다

 

‘양성평등’은 다양한 성적 지향을 담지 못한다. 언제고 이것은 두 개의 생물학적 성(sex)만을 바라볼 뿐이다. 대학에 ‘성 소수자 학생의 입학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걸었더니 교수가 철거하는 나라다. 소수자 혐오가 팽배한 현실에서 ‘평등’을 위해 ‘양성’을 고집할 때 구호 속에 남는 것이라곤 강력한 ‘정상성’ 이데올로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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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그러나 동성애는 반대 ⓒ중앙일보

 

효과 3. 양성평등은 힘을 잃은 구호다 

 

성 소수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국회의원조차 ‘양성평등’을 입에 올린다. (구)남성연대의 이름은 다름 아닌 ‘양성평등’ 연대다. 양성평등은 여성우월이나 역차별을 말하는 이들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용어다. 가부장제의 수호자들에게조차 전혀 위험하지 않은 단어. 활자 그대로로도 문제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용례에서도 이미 남성 중심 세계에 포섭된 ‘양성평등’을 우리가 ‘성 평등’의 구호로 사용할 이유는 없다.

 
이분법이 문제다. ‘양성평등’의 구호로는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을 향한 억압을 끊을 수 없다. 앞 글자 하나를 제하자. ‘성 평등’을 지향한다는 당신, 아직도 양성평등 할 텐가?

 

글. 압생트(9fif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