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자는 오디션을 거쳐야 한다. 오디션을 통과한 이들은 원한다면 춤 노래의 트레이닝을 지원받을 수 있다. 벤과 매니저 또한 제공된다. 슈퍼스타K 혹은 K팝 스타의 이야기냐고? 아니다. 모 외국어 학원 홈페이지에 걸린 강사 채용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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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여신’ 홈페이지 강사채용 정보 ⓒ 영어의 여신

 

이 학원의 메커니즘은 오늘날 개인이 상품이 되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아이돌을 생산해내는 회사의 문법을 그대로 따른다. 원한다면 제공된다는 춤·노래 등의 ‘트레이닝’ 과정은 개인을 소비자에게 매력 어필하는 ‘상품’으로 만들어낸다.

 

그 후에는 ‘매니저’를 붙여준다. 계속해서 이들이 매력적인 상품일 수 있도록 관리와 통제 수단을 붙여 돕는 것이다. 수강생을 대상으로 ‘팬’ 제도를 활용하여 마케팅의 동참자로 포섭하고 활용하는 전략까지, 이 학원은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내는 매니지먼트사의 문법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비즈니쉬(비즈니스+잉글리쉬)의 신데렐라’, ‘비즈니쉬의 여왕’ 등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각각의 개성 뒤에는 철저하게 구조되고 통제된 생산 관리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들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선택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글쎄, 당신은 이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게 아닐까.

 

상품화가 뭐 어때?

 

그러니까 이 상품화의 맥락에서 왜 하필 대상이 되는 것이 ‘여신’이냐는 말이다. 왜 강사들을 표현하는 말은 ‘비즈니쉬의 신데렐라’이며 ‘여왕’이고, 왜 이들은 스스로를 ‘여신’으로 어필해야 하는가?

 

누군가는 상품화의 물결에서 한 발짝 비켜있는 개인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전방위적으로 상품화가 행해진다는 말에 동의한다. 허나, 모른 척할 수는 있지만,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이 상품화는 더욱 약한 권력관계를 지닌 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준다. ‘소비와 수요’를 그토록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자’는 왜 비대칭적인 ‘수요와 소비’구조에서는 눈을 감는가. 이것이 ‘성별에 따라’ 달리 분배된 권력관계의 문제라고, 권력관계에 일어나는 ‘폭력’의 문제라고 왜 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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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여신’ 홈페이지에 게시된 공개강의 중 ⓒ 영어의 여신

 

강사가 ‘옷’의 종류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채팅창에는 ‘치마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들이 범람한다. 물론, 수업을 듣는 모든 이들이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나, ‘여신’이라는 워딩을 통한 마케팅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폭력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이를 묵과해야만 이 학원의 시스템은 돌아간다. 불쾌감을 느꼈건 그렇지 않았건 그녀가 대응 발언이나 사과요구를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 사회는 여전히 그녀를 ‘마케팅에 뛰어든 동조자’로 지목하니까.

 

하지만 정말 그녀들은 동조자인가? 진정 동조자로 지목되어야 할 것은 돈 되는 것은 뭐든 팔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와, ‘돈 되는 것’을 만드는 ‘남성중심사회’의 뒤틀린 욕망이다. 비슷한 전개 방식은 ‘성매매’ 문제에도 자주 나타난다. ‘많은 돈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판다’는 소수의 표상은 언제고 이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지만, ‘팔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낸 다수의 취약한 이들을 조명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뿐만이 아니다. 동양, 자연과 같은 소위 ‘여성화된’ 주체들을 향한 착취가 존재해야 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움직인다. ‘팔리는 것은 팔아야 한다’라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정언명령 속에서 ‘남성중심사회’는 그리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자발’이고 무엇이 ‘비자발’인가.

 

비단 이 학원뿐만이 아니다. 암묵적으로 ‘승무원’,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외모’는 필수라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심지어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지원 자격에 ‘정갈한 외모’를 요구한다. 상품화가 만연한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모습을 숨기고 사람들을 찍어내는 공장이 있다. 그 공장은 언제고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폭력’은 숨기고 아름다운 생산물만을 조명한다. 폭력은 제3세계, 여성 등 취약한 이들에게 향하고, 그 생산물은 1세계의 광고판 속 모니터에 아름답게 나타난다. 그것을 보고 그저 아름답고 이쁜 것이 최고라는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지, 그 구조 아래서 누락된 이들 역시 행복할지 의문이다. TV와 모니터를 끄고 나면 우리는 다시 ‘상품’을 사기 위해 우리를 팔러 나가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글. 압생트(9fif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