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의 오랜 팬임을 자처하면서도, K리그의 인기는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그동안 K리그는 확실히 인기가 없었다. K리그 팬이라면 텅텅 빈 경기장의 풍경은 익숙하다. 하지만 K리그 개막전이 열린 3월 12일, 택시를 타고 내린 전북월드컵경기장은 그동안 익숙하던 한산함을 찾을 수 없었다.

 

경기장 앞은 태평소 소리와 함께 사람들로 가득하다. 개막전이라는 특수성, 두 팀의 기대치가 함께 반영됐다고 해도 작년 전북과 성남의 개막전과는 다른 분위기다. 서울에서 전주로 가는 오전 버스가 대부분 매진됐다는데, 매진의 이유에 개막전이 일조하지 않았을까.

 

웅장한 경기장, 같은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 속에 있다 보면 온몸이 저릿하기 마련이다. 유럽의 축구장에서 처음 느낀 저릿함이 이곳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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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멍하니 서 있는 순간 치킨 냄새가 나는 봉지가 내 앞에 불쑥 들어온다. “축구는 역시 치맥 아니겠습니까?”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두 손 가득 치킨 봉지를 들고 있던 장사꾼이 턱밑까지 치킨을 들이민다. 군침이 돈다. 아뿔싸, 지갑에 남은 현금이 없다. 장사꾼은 툴툴거리며 떠난다.

 

그 어딜 가더라도, 녹색 옷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전북의 유니폼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은 줄이 길게 늘어져 터질 것만 같다. 매표소도 마찬가지다. 아까 본 장사꾼도 녹색 옷을 입고 있다. 토마토 축제가 온통 붉은색의 세상이라면, 이곳은 태평소 소리와 함께 하는 녹색의 세상이다.

 

K리그의 ‘레알마드리드vsFC바르셀로나라’고? 응, 인정

 

경기장 밖은 녹색의 축제, 혹은 시장통 같다. 신기하게도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즐거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긴장감이 감돈다. 2시 경기지만 경기 시작 전부터 일반관중석과 전북응원석, 서울응원석은 가득 찼다. 경기장 밖과 같은 점은 단 하나, 고개를 돌려봐도 온통 녹색뿐. 서울의 빨간 색은 반도마냥 경기장의 4면 중 한 면에만 머물러 있다. 이곳저곳 좋은 자리를 탐색해 겨우 골라 앉는다. 그늘진 곳이다 보니 패딩을 입어도 춥다. 내 앞에는 ‘이동국’이란 이름 석 자가 적힌 전북 유니폼의 아저씨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 아저씨는 패딩을 입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패딩을 입을지 말지 고뇌하다 결국 패딩을 입는다. 하필 패딩이 빨간색이다. 전북팬이 서울팬으로 둔갑한 것 같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선수들이 몸을 풀자 양 팀 응원석은 요동친다. 선수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팬들은 북을 치고 환호성을 지른다. 일부러 긴장감을 심어주려는 듯 벌써부터 응원가를 부르기도 한다. 전북 팬들은 자신들의 레전드 이동국이 슛 연습을 하다가 골을 넣으면 열렬히 환호하고, 서울의 박주영이 실수를 하면 야유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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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예비후보가 와서 인사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았다..

 

전북의 선발 선수명단이 발표됐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장내 아나운서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친다. 슬슬 긴장감이 감돈다. ‘K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대결’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몸을 다 푼 선수들이 킥오프 만을 앞둔 순간 관중석 앞 통로에 웬 중년의 아저씨가 나타난다. 확실히 선거철이긴 하다. 중년 아저씨 옷에 “새누리당 전주갑 천상덕”이라는 글씨가 크게 박혀 있다. 전북의 머플러를 들고 열심히 인사하지만, 킥오프를 앞둔 마당에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 별 관심이 없다.

킥오프!

마침내 오후 2시. 주심의 휘슬과 함께 FC서울의 데얀과 아드리아노의 선축으로 2016 K리그가 개막한다. 환호하는 와중에 관객석 앞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진다. 대부분의 관객은 놀란 눈치이나, 이내 다시 환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울의 오스마르가 경기 시작 20초 만에 위협적인 중거리 슛을 하자 킥오프의 환호성이 20초 만에 잠잠해진다.

 

골 찬스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며 초반 기세는 서울이 가져간다. 거듭되는 서울의 골 찬스와 답답한 전북의 모습에 서울 팬들은 기세등등하게 응원 소리를 높인다. 20분까지 서울의 우세가 계속되자 “아니 김신욱은 무슨 거북이야”, “와……서울 너무 잘해”, “진심 전북 너무너무 못해 죽고 싶다” 등 팬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런 전북 팬들을 다시 환호하게 한 것은 올해 36살의 루이스다. 루이스는 마치 황소 같다. 루이스가 공을 몰기 시작하면 서울 선수들은 우왕좌왕 수비하느라 바쁘고, 그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루이스는 36살에 아직도 에이스 놀이한다’고 여기저기 웃음 섞인 응원이 터져 나온다.

 

루이스의 프리킥

그러나 아쉽게도 전북은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슛을 하지 못한다. 반면 서울은 시종일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당연히 서울 팬들은 신나서 노래 부르고, 전북 팬들은 시무룩하게 구시렁거린다. 이장님(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의 애칭)이 드디어 늙었다며, 이동국과 김신욱 같은 발이 느린 거북이 두 명을 함께 출전시켜서 어쩌겠냐는 소리까지 나온다.

 

전반이 끝나고 쉬는 시간, 이상한 비빔밥이 등장한다

 

0:0으로 끝난 전반전, 서울 팬과 전북 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전반은 아닐 것이다. 서울 팬 홍경수 씨는 ‘애무(패스와 드리블만 하고 골을 못 넣는 상황)만 하는 것 같고, 전북이 너무 수비를 잘하고 서울이 공격을 너무 못한다’고 한다. 놀랍다. 그래도 전북 팬보다는 만족스럽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다. 전북 팬 이화진 씨 역시 그냥 ‘노답’이라며 자신의 팀을 비판한다. 확실히 팬들의 눈이 높아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 두 팀 다 못해서 그렇게 욕을 먹는지 판단할 길이 없지만, 이번 경기가 무승부로 끝났을 땐 그 후폭풍이 클 것 같다.

 

하프타임에 뜬금없는 행사를 진행한다. U-20 월드컵의 유치와 성공을 기원하며 축구를 추가한 전주비빔밥을 만드는 행사다. 어마어마한 통에 밥과 나물이 담겨있고 그것을 뒤섞는다. 밥을 섞는 주걱이 마치 곤장 같다. 썩 좋지 않은 비주얼의 비빔밥을 보고 있자니 식욕이 떨어질 만도 하지만 오히려 온전한 비빔밥의 모습이 떠올라 배가 고파진다. “만든 비빔밥은 자원봉사자분들이 관중 여러분께 나눠드릴 것입니다.” 만세! 엄청난 거품 가격의 축구장 음식을 알고 있기에 공짜 비빔밥을 준다는 소식이 매우 반갑다.

 

전반전 동안 해가 자기 위치를 옮긴다. 잠시 그늘이 사라지고 햇빛이 비친다. 햇빛 덕에 꽤 따뜻하다. 빨간 패딩 아저씨도 이때를 기다린 듯 패딩을 벗고 자신의 녹색빛 이동국 유니폼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날씨는 다시 급격하게 추워진다. 내복을 입고 가지 않은 사실을 후회한다. 녹색 유니폼 아저씨도 다시 빨간 패딩 아저씨로 돌아온다.    

 

이야~ 박주영 나온다!

 

하프타임 도중 나갔다 온 관중들이 돌아오며 잠시 어수선한 틈을 타 후반전이 시작된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진다. 전북은 수비형 미드필더 파탈루를 빼고 공격수 레오나르도를 투입한다. 레오나르도의 투입으로 관중석은 술렁인다. 레오나르도는 이동국, 김신욱과는 다르게 빠른 발과 유려한 개인기를 가진 선수다. 뒤에 앉아 있던 전북 팬은 함께 온 여자친구에게 레오나르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한다. 아쉽게도 여자친구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후반전은 매우 치열하다. 특히 전북의 공격이 살아나자 분위기는 미친 듯 달아오른다. 조금의 신체접촉이나 격한 플레이가 나오면 바로 야유가 쏟아진다. 서울이 공격하면, 전북이 막아내고 곧바로 역습으로 전개하는 방식의 반복이다. 전반보다 속도감이 빨라져서 그런지 관중들의 목소리에서 그 흥분감을 엿볼 수 있다. 루이스는 여전히 황소 같다. 관중들은 레오나르도와 루이스의 이름을 연호한다.

 

마침내 골이 터진다. 전북의 코너킥 상황에서 김신욱의 헤딩 골이다. 역시 축구는 골이라고, 드디어 고대하던 골이 터지자 경기장은 떠나갈 듯하다. 그렇게 욕먹던 김신욱이 골을 넣자, 관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김신욱을 찬양한다. 빨간 패딩 아저씨에게 김신욱은 거북이에 전봇대였지만, 골을 기록하자 어느새 고공 폭격기가 됐다.

 

서울은 득점을 위해 박주영을 투입한다. 관중들은 박주영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만 잡으면 ‘따봉’이라고 외친다. 이제 한 골 넣었겠다, 마음 편하게 응원하는 전북 팬들이다. 서울 팬들은 조용하다. 이따금 소수의 인원이 응원가를 불렀지만 이내 잠잠해진다.

 

서울의 후반 막판 공세

 

서울의 공세가 심해진다. 위협적인 기회도 많이 나온다. 서울의 기회 하나하나에 전북 팬들은 더는 조롱하지 않는다. 숨을 죽이다가 슈팅에 놀라고, 이내 전북의 수비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낸다. 순간 전북의 빠른 역습이 시작되면 미어캣 마냥, 고개를 휙 돌린다.

 

아드리아누의 오버헤드 킥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경기는 끝이 난다. K리그 개막전은 그렇게 전북의 1:0 승리로 끝났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보이나 대부분은 경기장에 남아 승리를 만끽한다. 전북 선수들은 팬들에게 인사 후 함께 승리 세레모니를 한다. 팬들이 어깨동무하고 부르는 노래는 압권이다. 다만, 일반 관중들은 그 분위기가 어색한지 함께 응원하지 않는다.

 

경기 후 승리 세레모니

 

적어도 전북 팬들에게 K리그 첫날은 한바탕 잔치처럼 끝이 났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전북 팬들은 신나게 웃으며 벌써 K리그 우승 얘기를 한다. 서울 팬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 그러나 큰 근심 걱정이 있는 얼굴은 아니다. 첫판부터 우승팀을 만나 아쉽게 졌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다.

 

기분 좋게 경기장을 떠났지만 한 시간 넘게 경기장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만 명의 관중이 한꺼번에 빠져나온 전북월드컵경기장 주변은 교통지옥이다. 택시와 버스는 온통 축구 팬들로 가득하다. 바람이 세다. 다시 한 번 내복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후회한다. 한시간 반만에 택시를 잡고 버스터미널에 내려 성남행 버스를 탄다. 핸드폰으로 툭탁, 다른 경기를 확인해 본다. 성남FC는 수원 삼성에 2:0으로 이겼다. 광주FC와 포항 스틸러스는 3:3으로 비겼다. 댓글을 보아하니 두 경기 모두 ‘꿀잼’을 선사한 모양이다.

 

K리그는 이렇게 출발했다. 11월 종착점에서 누가 우승 트로피를 틀어 올릴지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시작점은 11월까지를 기대할 만하게 한 최고의 날이었다.

 

 

영상. 통감자 (200ysk@naver.com)

사진. 통감자(200ysk@naver.com)

글. 통감자(200y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