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내 주변에선 찾을 수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치는 일상이며, 일상 역시 정치입니다. 우리는 몇 번을 열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러시아의 민속 인형 마트료시카가, 일상을 파고들 때마다 마주치는 정치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의 단상들을 정치와 연결짓는 [마트료시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나는 올해로 5년 차 대학생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너희 학과는 어떤 곳이야?”라고 묻는다면 해줄 말이 없다. 나는 1학년 때부터 소위 말하는 ‘아싸’(아웃사이더, 학과생활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학생)였고, 함께 입학한 80명이 넘는 동기 중에 내가 꾸준히 연락해 온 사람은 5명이 될까 말까 하기 때문이다. 내가 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여자가 많다’ 정도? 그런데 바로 그 여자가 많은 곳에서 ‘여성주의’를 말하기 위해 나는 의도치 않게 학과에 대자보를 쓰게 됐다.

 

“여성주의 모임 할래?”

 

이번 개강 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날, (꾸준히 연락해온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동기 한 명이 연락해왔다. 그는 학과 활동, 학과 밖 활동 모두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동기였다. “우리 과에서 여성주의 모임 하지 않을래?” 평소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던 그는 학교 내 여성주의 단체에서 활동하는 내게 제안했다. 학과 내 여성주의에 대해서라면 ‘여자가 많은데 왜 학생회장은 대부분 남자일까’ 정도의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첫째로 뭔가 재밌어 보이고, 둘째로 적당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하에 큰 고민 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내게 연락한 동기는 나 말고도 이미 다른 이들에게 함께 하겠다는 답을 받아놓고 있었다. 그렇게 초대된 ‘카톡방’에는 나와는 달리 학과생활을 열심히 했던, 혹은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까맣게 모르고 있던 학과 내 술자리에서의 성추행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 경험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속한 학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반(反)여성주의적이었고, 그들은 거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화장을 하든지 집에 가든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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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사 화장을 하든 말든 ⓒ PONY Makeup

 

두 가지 일을 했다. 먼저 학생회장단 선거에 출마한 선거운동본부(선본)에게 여성주의 정책과 관련한 질의서를 보냈다. 학과 술자리에서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발생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대책이 있느냐는 식의 질문들을 정리해 선거관리위원장을 통해 전달했다. 동시에 학과 내에서 경험했던 성차별 발언과 성추행 사례를 익명으로 수집했다.

 

즉각적으로 반응이 온 것은 단연 후자였다. 수집된 사례는 카톡방에서 전해 들은 것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어떤 여학우는 담배를 핀다는 이유로 남자 선배들에게 까였고, 화장을 하지 않고 학교에 왔다는 이유로 “화장을 하든지 집에 가든지 해라”는 폭언을 들은 여학우도 있었다. “너도 살 빼면 남자한테 번호 따일 걸” 같은 외모 평가는 일상이었다. 남자만이 모인 카톡방에서 여성의 외모 평가가 일상적으로 이뤄진다는 남학우의 제보는 수집된 사례들을 뒷받침했다.

 

성차별 사례를 수집하는 와중에 선본이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보냈다. 여성주의나 소수자에 대한 구체적이고 깊은 고민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질의서와 답변을 정리한 대자보 하나, 수집된 성차별 사례를 정리한 대자보 하나, 두 종류의 대자보를 학교 곳곳에 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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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일보

 

진행과정이 마냥 놀랍기만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 놀라움보다는 성차별을 고발한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강의 전후 쉬는 시간, 같은 학과 학생이 그득한 강의실에서 ‘대자보’ 비슷한 단어만 들려와도 나는 움찔했다.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는 예감이 들 때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슬며시 끄고 귀를 기울였다. 두려운 것은 내 개인의 안위만은 아니었다. 한 다리 건너면 대부분 다 아는 사이인 학과에서 성차별을 제보했다는 이유로 사례 수집에 참여한 누군가가 비난받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컸다.

 

다행히도 내가 남몰래 호들갑을 떤 만큼 엄청난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대놓고 쌍욕을 듣지도 않았고, 여기저기 붙여놓은 대자보가 훼손되지도 않았다. 물론 모든 과정이 순탄하게 흘러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본의 누군가는 우리를 언급하며 “거기 대체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페이스북의 ‘00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엔 “담배 피우는 여자 싫다고 하는 게 성차별이냐”는 글이 올라왔다. 익명의 제보였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 학과 소속 남성일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응원을 가장해 ‘오빠의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하는 남성도 있었다.

 

비록 ‘정신승리’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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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라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그리고 오늘, 대자보를 부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 대자보를 철거했다. 질의서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놓지 못한 선본이 학생회장단에 당선됐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여전히 학과 술자리에선 ‘게이샷’, ‘러브샷’ 따위가 누군가의 불편함을 비웃으며 이뤄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 일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앞으로도 쭉 학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위에는 관심 둘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어쩌다 아주 우연한 기회를 만나 꽤나 급진적인(?)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게 됐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것이 많다. 내 기준에선 대범한 방식이었음에도 변한 것도 거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더라도 이 일을 금방 그만두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감한다. 이것이 설령 ‘정신승리’라 하더라도 무위보다는 나을 것 같단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글. 아레오(areoj@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