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이슈팀의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텍스트를 소개하려 합니다. 공부합시다!

 

페이스북에 ‘김치녀’를 검색하면 페이지가 네 개쯤 나온다. 16만 명이 구독하던 원조 김치녀 페이지가 이상해진 후에(해킹을 당했다는 썰도 관리자가 계정을 팔아버렸다는 썰도 있다. 어쨌든 지금은 페이지의 본 목적과 상관없는 외국 기사만 올라온다.) 새로 생겨난 김치녀 페이지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1~2만의 구독자가 김치녀 페이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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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

 

김치녀 페이지의 정체성은 소개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들이 생각하는 김치녀를 정의하고, 하루에도 몇 건씩 ‘김치녀’에 부합하는 여성들에 대한 게시물을 올린다.

 

김치녀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여성들은 ‘김치녀’일까. 페북 외에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떠돌아다니는 ‘무개념 한국 여성’은 ‘김치녀’일까.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에 실린 윤보라의 논문 ‘김치녀와 벌거벗은 임금님들(2015)’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김치녀 신화를 해체하고, ‘김치녀’를 규정하는 인식의 틀을 비판한다. 이번 청년 연구소는 윤보라의 논문을 통해 온라인 여성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혐오 받아 마땅한’ 여성의 탄생

 

‘김치녀’라고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세상에, 완전 썅X이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혐오 받아 마땅한 여성이라고.

 

기존의 ‘김치녀’ 표현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과 남성들의 반박을 살펴보자. ‘김치녀’가 일베와 직결되는 용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적어도 ‘된장녀’보다는 많은 반발을 초래했다.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는 비판에, 남성들은 ‘일부’ 혐오스러운 여자들한테만 쓰는 거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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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치녀’ 관련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 “김치녀는 대한민국 전체에 널려 있다?”

 

‘일부’라는 방패가 나오면 논란은 흐지부지된다. 애초에 혐오스러운 인간 유형으로 ‘일부’ 김치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사례들에 기대어, 어딘가에는 혐오 받아 마땅한 ‘여성’이 있다는 전제가 수용되고, ‘김치녀’가 탄생한다. 중요한 것은 그 혐오의 유형들이 사람이 아닌 여자로 규정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김치(한국을 상징)녀라는 워딩에서 드러나듯, 이것은 혐오 받아 마땅한 한국 여성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윤보라는 비난의 이유비난의 대상이 가진 속성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 한국 여자(김치녀)를 욕하냐는 질문에 대해 “이기적이고 남성을 이용해 욕심을 채우기 때문”이라는 답은 비난의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혹은 비난받아 마땅하게 보이도록 설정된) 여성의 유형에 해당할 뿐이다. ‘썅년’ 이미지의 한국 여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런 유형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썅년들’

 

윤보라의 말을 빌리자면, 비난받아 마땅한 ‘썅년’들은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된다. 누군가는 여전히 ‘현실의 여성을 참조’했다는 데에 방점을 찍고 싶겠지만, 중요한 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거나 짧은 치마를 입는 여성들이 혐오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지만, 그 기저에는 해방 뒤의 혼란을 가리기 위한 여성 섹슈얼리티의 이미지화가 있었다. 6~70년대에는 미혼 여성의 직장생활이 비난받았다. 사치와 낭비를 이유로 들었지만, 그 기저에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으로 인해 사회가 여성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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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캡쳐

건축학개론 ‘서연'(수지 분)에 대해 “위자료 많이 받으려고 해서”, “이제훈 말고 돈 많은 선배한테 가서”, “돈 많은 남자 꼬시려고 해서” 등등의 이유를 대며 ‘김치녀’라고 호명한다.

 

이처럼 사회의 지배구조 재생산을 위해 ‘썅년’은 늘 구성된다. 윤보라는 2010년대의 ‘나쁜 여자’ 유형으로 ①이기적이고 몰염치한 자, ②무능하고 한심한 자, ③공동체 의식이 부재한 자, ④성적으로 방종한 자를 제시하고, 어떤 필요에 따라 그러한 여성들이 ‘나쁜 여자’가 되었는지 밝힌다.

 

김치녀와 여성 혐오, 그리고 끝?

 

바야흐로 ‘여성 혐오’가 범람하고 있다. 이제 ‘여혐’이라는 말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김치녀에 대한 논의도 일베, 그리고 여성 혐오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성 혐오를 일베만 가지고 논할 수 없는 것처럼, 김치녀 역시 여성 혐오로만 논할 수 없다.

 

김치녀는 여성 혐오의 원인이 아닌 결과다. 김치녀가 있어서 여성을 혐오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성 혐오라는 기저 심리에서 ‘김치녀’가 탄생한다. 여성 혐오에서 출발한 김치녀 신화가 어떤 사회적 함의를 지니는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윤보라는 김치녀 신화가 ‘여성 개인’을 삭제하고 ‘여성 유형’만을 남긴다고 지적한다. ‘썅년’이 아닌 여자는 탈김치녀, 조금 더 좋게는 개념녀 정도로 호명된다. 여성들이 ‘김치녀’ 혹은 ‘탈김치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어떤 여성도 ‘김치녀’(와 이를 규정하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성을 ‘김치녀’에 가두는 작업을 위해 남성들은 반복적으로 혐오스러운 김치녀 플롯을 생산하며, 반드시 김치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주작’을 동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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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으로 여혐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도넛 주작 사건. 구글에 있는 이미지를 도용하여 회사의 여성 직원들을 비난하는 거짓된 글을 썼다.

 

김치녀 신화는 극단적으로 표출된 여성에 대한 타자화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남성과 같은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제 어느 정도 그 성과를 보이고 있다. 드디어 여성이 성(sex)을 넘어선 세대, 직업, 취향으로 호명되게 되자 그 주체성을 억누르기 위한 전략으로 XX녀 열풍이 나타난 셈이다.

 

실제로 김치녀라고 욕먹어도 싼 여자가 있는데? 내 주변에서 ‘김치’를 봤니 마니 식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개인에 대한 비난과 특정 성(sex)의 혐오 유형화를 구분해야 한다. 혐오 받아 마땅한 여성이 있듯 혐오 받아 마땅한 남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성들은 남성 개인으로 욕을 먹을 뿐, 남성 유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은 성별(sex)로 보고, 남성은 인간으로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김치남’은 ‘김치녀’에 대항할 수 있을까

 

물론 ‘김치남’이라는 용어도 있다. 지난해 페이스북에는 ‘김치남 페이지’가 생겼다. 그러나 소개글에서 알 수 있듯, ‘김치남’은 ‘김치녀’의 반대급부로 나온 미러링 현상이다. ‘김치녀’가 지배구조를 재생산하는 효과적인 전략인 것에 대항해 ‘김치남’이 지배구조를 타파하는 효과적인 전략이 되는 길은 훨씬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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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김치남’ 페이지

 

여성에게는 지배자의 언어가 없다. 노동자 계급이 그랬듯, 피식민지 국가가 그랬듯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자의 언어를 빌려 말할 수밖에 없다. 스피박은 그걸 “적의 무기로 싸운다”고 표현했다.

 

‘김치남’에 대한 여성들의 발화는 ‘김치녀’라는 남성들의 언어를 빌려온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 유형화한 것처럼, 여성도 남성을 혐오 유형화하며 어떤 인간이 ‘개인이 아닌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의 폭력성을 밝힌다. 그러나 미러링으로서 ‘김치남’은 등장 당시에 강력한 펀치 한 방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현상이기 때문이다. 김치녀는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은 온 사회의 동조 속에서 자연(당연)스럽게 재생산되지만, 김치남은 억압자들의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간신히 이어진다. 김치녀의 기저에 여성 혐오가 있고, 김치남의 기저에도 (남성 혐오가 아닌) 여성 혐오가 자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윤보라는 논문의 제목에 ‘벌거벗은 임금님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마치 옷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김치녀 신화도 그렇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래요!”라는 외침 한 마디에 진실이 밝혀졌지만, 김치녀 신화를 부수는 건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여성도 ‘유형’이 아닌 ‘개인’으로 대우받게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가부장제를 부수는 작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치녀가 사라진다 해도, 또 다른 ‘ㅇㅇ녀’의 덫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표지 이미지. ⓒ 영화 ‘500일의 썸머’

글. 달래.(sunmin5320@naver.com)